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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작가노트

바코드와 디코드의 간(間) 풍경

artist review

아르코미술관의 2005년도 대표작가로 선정된 양주혜 Yang Juhae의 <길 끝의 길전>이 아르코미술관 전관에서 열리고 있다(2005.12.28~2.11). ‘색점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점과 선이라는 보편적인 조형요소를 가지고 건축물에 미술을 덧입히는 설치작업을 해왔다. 사물의 정체성을 읽어 내는 ‘바코드’에 대한 관심을 풀어낸 최근 작업을 중심으로 작가의 예술세계를 살펴본다.

바코드와 디코드의 간() 풍경    강수미 ∙ 미학

스스로를 읽고 싶고,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서 그 자신 완전한 암호를 닮아버린 미술이 양주혜의 바코드(bar-code) 작업이다. 즉 이 미술은 작가의 욕망처럼 독해된(decoded)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욕망을 뒤집은 방향, 즉 암호화된(encoded) 상태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바코드가 바코드 리더(reader)에 의해 읽히듯, 양주혜의 바코드 작업은 ‘바코드미술 리더’에 의해 읽혀야 한다. 이때 ‘바코드미술 리더’는 당연히 이 암호의 해독자, 작품의 감상자이다.

과학자에게 바코드는 컴퓨터가 광학적으로 또는 자기(磁氣)적으로 정보를 읽기 쉽도록 만든 흑백의 평면 코드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손님에게 바코드는 계산해야 할 상품의 고유번호가 입력된, 물질을 비물질로 압축한 기호이다. 그런 바코드를 문화 비판론자들은 사물을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로 축소시킴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거세하는 천민자본주의의 대표적 기호라 비판했다. 언젠가 인간도 그렇게 바코드화 될 것이라는 우려를 그 비판의 근저에 깔고서, 컴퓨터 공학자들이 바코드를 공학의 발전과정 중 한 성과 정도로 생각한다면, 판매원과 소비자는 바코드를 별다른 가치판단 없이 그저 ‘사용’ 할 뿐이다. 그리고 논자들은 그러한 사용에 대하여 또는 바코드의 대(對) 사회적 의미에 대하여 ‘재고’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쨌든 바코드라는 사회적 혹은 공적 코드에 대하여 공적-공적 효용과 공적 담론–으로 대응한다. 그런데 바코드를 대하는(다루는) 길에 이러한 입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코드에 대한 미술가와 미술 감상자의 길이 있을 수 있다. 그 길은 아마도 아주 사적인 코드화와 독해의 길로 보일 것이다. 그 길은 어쩌면 과학자에게는 비논리적 상(像)과 그 읽기에 불과해 보일지도 모르고, 평범한 계산원이나 소비자의 눈에는 허황되지만 미적으로 보일지도, 비판적 지식인인 연하는 논자들에게는 자본주의 상품 물신에 무비판적이거나 그러한 환영을 부추기는 것, 그러한 환영에 기꺼이 빠져드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양주혜가 근래 바코드 이미지를 가지고 다변적으로 하는 작업이, 우리의 흥미를 끄는 동시에 여러 가지의 ‘읽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앞서 세 입장으로 언급한 바코드의 정체성을 모를 리 없는 작가의 바코드 작업은 그 입장들의 사잇길을 만들어 우리에게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말하자면 바코드의 직통로가 아니라 디코드의 우회로이다. 그 우회로에서 어떤 이는 과학적 장치의 다음 발전 모델을 볼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공적 코드에 대입된 작가의 경험을 읽고 즐길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문화 산물에 대한 자신의 일반적 비판이 지닌 평범성과 비생산성을 반성해 볼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여기서 논해 볼 만큼 일견 단순해 보이고 암호처럼 닫혀 있는 양주혜의 바코드 작업은 맥락이 있으면서도 맥락을 벗어난다.

공적 장소와 사적 미술코드의 차이

미술관 유리 파사드에는 원색의 직선과 숫자로 구성된 바코드가 기입돼있다. 마치 아르코미술관의 물리적이고 질적인 정체를 압축시켜 암호화해 놓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건물 정면만이 아니라 그 컬러 바코드는 붉은 벽돌의 미술관 건물 외벽 곳곳에 뚫린 유리창마다 표기되어 있다. 그것들은 우선 회색 정체의 미술관 공간을 선명한 기호(sign-taste)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동시에 바코드는 하나의 공통 기호 끈이 되어 평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그 규모 있는 공간의 부분들을 묶고 있다. 아르코미술관 외관에 기입된 바코드의 시각적 기능이자 효과에 대해 이렇게 시각적 스케치를 해 보지만, 우리는 아직 이 바코드가 표상하고 잇는 암호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까 유추해 보았듯이 미술관의 물리적이고 질적인 정체를 질료로 삼아 압축해 놓은 것일 것? 그래서 그 바코드 하나하나의 선과 숫자는 구체적으로 미술관의 어떤 성질 혹은 사실과 연결될까? 아니면 그 바코드들을 읽을 거대한 바코드리더가 있어 이 미술관의 값을 간단히 매기는가?

그런데 다시 보니 미술관 파사드와 유리창의 바코드는 미술관측이 자체에 부여한 코드가 아니라 지금 거기서 열리고 있는 양주혜의 개인전 <길 끝의 길>작품 중 가장 바깥에 위치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아르코 미술관의 1층과 2층, 소 갤러리에 들어가 잇는 양주혜의 전시 작품들을 대표하는 것이 이 바코드들이고, 그런 한에서 이 바코드들은 양주혜 작업의 식별표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양주혜는 미술관을 읽어내 바코드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전작(全作)을 읽어낼 암호를 제시한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전자가 미술관 담론에 대한 미술이라면, 후자는 작가 자신의 미술에 대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입장과 그 해독은 아주 큰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음 할 일은 전시장 내부로 들어가 양주혜 미술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읽어 보는 것이다. 오로지 작가 작업의 이해를 위한 편의성 때문에, 우리는 양주혜의 1980~1990년대 평면작품과 최근의 영상 설치작업이 함께 전시된 2층 전시장을 먼저 둘러볼 것이고, 다시 현재의 바코드 작업이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확장된 작업을 선보이는 1층과 소 갤러리로 이동할 것이다.

우선 2층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좁고 어두운 통로이다. 그 통로 끝에 다다르면 치과에서 쉽게 보는 치아 모형이 굵은 소금 밭에 파묻혀 있는 위로 알 수 없는 영상이 흐르는 <흔적찾기>를 만난다. 통로의 어둠은 상당히 깊고 길며, 그 길 끝에서 만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육신의 일부인 치아(모형)의 무덤이어서인지 여기서 우리는 가벼운 공포와 일말의 죽음을 연상하게 된다. 이 공포와 죽음이 양주혜 미술을 읽을 하나의 단서인데, 가늠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공포가 양주혜로 하여금 평면을 잘게 그리드로 분배하게 했으며, 그 위에 원색의 점들을 찍어 나가도록 했다. 또한 의사소통에 대한 단절감(죽은 것, 탈구된 치아는 말하지 못하므로)이 작가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한 강박과 바코드에 대한 동경을 부추겼을 것이고, 읽고 읽히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흔적찾기>를 빠져 나오면 우리는 큰 전시장 벽들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걸린 평면작품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이 ‘양주혜=색점 작가’로 인지케 한 작품의 일부이자 작가의 평면과 텍스트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변모하는지 감촉하는 계기들이다. 일종의 러그같이 보이는 이 대형 천 위 색 점 작업들은 정사각형 격자나 법계도 형상을 새긴 천 위에 반복적으로 여러 원색의 점을 찍어 가득 메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색 점의 반복이 주는 아름다움이나 생활 디자인 소품으로의 활용 비슷한 것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이를 텍스트로 읽을 것이다. 파리 유학 시절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불어 원서 과제를 텍스트 위에 색 점을 덧찍어 제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하는 이 작가에 따르면, 각각의 색점은 마치 문자 기호처럼 각각의 음가와 의미를 가지고 있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음가와 의미를 모르는 한, 그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비의적(秘意的) 기호에 머물며 우리의 양주혜 미술에 대한 해독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를 양주혜 미술의 역설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의사소통을 위해 ‘읽기와 덧쓰기’를 꾸준히 수행하고 있지만 그것은 작가만의 암호로 닫혀 있으며, 우리는 그 텍스트들의 실제 내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작가의 의도가 모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역설의 이면에 어떤 이해가 생긴다. 작가는 현실의 바코드를 보여 자신도 스스로를 바코드처럼 읽어 봤으면 했고(실제로 읽기는 바코드리더가 수행하지만), 그래서 바코드 작업을 하게 됐다고 했다. 통약 불가능한 기호들의 갈래, 텍스트성 이미지의 갈래, 작가는 그 스스로 알 수 없는 여러 표상과 의미의 갈림길을 경험하며 자신도 명확히 서술할 수 없는 풍경을 보고 있고, 그것을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음의 상태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해서 우리의 해독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해가 생기는 것이다.

길 끝의 길과 그 사이의 의미전달

1층으로 내려오면 평면 바코드를 마치 3차원 공간에 일으켜 세운 듯한 입체 바코드 작업을 만나게 된다. 전시장 전체를 쓴 이 대형 설치작업은 바코드 숫자에 장착된 빛의 깜빡임에 따라 사운드가 흘러나오고 바코드 막대 선이 걸개그림들로 변형된 작품이다. 우리는 새의 눈이 되어 이들이 그리는 전체 바코드 풍경을 볼 수 없으나, 추상적 선과 숫자로 여겨왔던 바코드 속을 헤집고 다니는 몸의 감각은 얻을 수 있다. 전시를 관람했던 한 과학자는 이 입체화된 바코드와 원색으로 구성된 바코드 작품을 보며, 현재 바코드의 미래 진화형을 작가가 예측했다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 놀라움은 작가와 과학자인 감상자 간 일종의 의사소통으로 여겨지는데, 미적 소통이나 텍스트 해석에 입각한 소통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생각할 바를 준다. 사실 양주혜의 색 점 작업이나 바코드 작업은 앞서도 간혹 넌지시 제기했듯이 작가가 ‘읽기-해독하기’를 의도함에도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로 닫혀 있고, 그래서 소통은 상호이해보다는 이해의 사잇길을 각자가 걷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과학은 구체성의 차원에서 이러한 미술작품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길 끝의 길》전시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볼 소 갤러리에서는 말의 현실적인 의미에서 ‘바코드 기능’이 역할을 다 하며 또 다른 소통을 이루어내고 있다. 이 곳에서는 바코드로 장식된 아크릴 서가가 법계도 형태로 배치된 가운데 여러 출판사에서 협찬한 잡지와 책, 작가들의 전시도록이 전시 관람객의 손에서 눈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구매 행위로 이어진다. 그래서 어쩌면 양주혜가 애초 ‘바코드’로 떠올렸던 의미와 기능에 가장 부합한 미술이 펼쳐지는 곳이 이곳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가 전시장 전체를 돌아보면서 마주친 작품들 중, 상징적 코드로서 작가의 의도가 덧씌워진 바코드나 색 점 작업들은 우리를 각자 자유로운 해독의 길로 데려간 반면, 소 갤러리에서는 바코드의 의미가 실제로 기능함으로써 사적 해독의 길 끝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규정된 바코드가 아니며 양주혜의 미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해독의 길을 더 가고 싶고 가게 될 것이기는 하다.

길 밟기 stepping a street - 명륜동 접는 미술관

길 밟기 stepping a street

과연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공공미술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 아니 굳이 공공미술이라 이름 붙여 작업을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작업입니다. ‘공공미술’ 이라는 용어가 갖는 ;공공성’이 과연 ‘작품성’과 어떻게 공존 할 수 있는 걸까요? 비개성의 공적인 공간을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변환시켜 거시서 오는 ‘낯설음’을 경험하게 하여 공간 자체의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일련의 저의 작업의 의도입니다. 이번 작업의 어려웠던 점은 버스에 부착하고 다니는 광고물을 떼어내고 작업을 하기 위한 과정에 있었습니다. 기획팀 측에서 광고대행사와 협상하여 ‘위약금’이라는 명분으로 일정 금액을 주고 해결한 것을 작가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저 예산 작업으로서 지원되기로 한 제작비에 비할 때 적지 않은 금액을 내게 하면서까지 이 작업을 해야 하는가 하는 망설임 끝에 도시 환경 속에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진 광고물을 달고 돌아다니는 버스들을 무방비 상태로 바라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였고 적어도 그에 반응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옳은 태도라고 생각하여 작업을 진행시키기로 하였습니다. 버스가 운행에 있어서 여유가 없었기 떄문에 일요일 하루 밖에 작업 할 수 없었습니다. 한 겨울에 불빛도 없는 노상에서 밤을 세워가며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만으로 1차 작업을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으며 며칠 운행하던 중 장의차 같다는 설과 유치원 차 같다는 두 방향의 전혀 다른 반은 가운데 2차 수정 작업을 거쳐 끝낸 작업입니다. 다양한 작업환경과 각양각색의 여건에서 작업을 해오면서 그럴 때마다 작가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는 변 이외의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ㅡ 8번 마을버스를 타면 우리는 작가 양주혜의 바코드의 세계로 들어간다. 빛으로 읽힌다는 바코를 명륜동이라는 코드 속에 탑승한 사람들을 다르게 상상하게 된다.

색 바코드 - 공간을 치다 - 경기도미술관

색 바코드

나는 바코드를 통해 공간이나 어떤 사물,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롤스크린 위에 바코드를 실사프린트 함으로써 롤스크린을 올리고 내리는 행위를 통해 나의 작품이 공간을 치고 빛을 투과시키거나 막음으로써 공간의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나의 바코드를 이루고 있는 선은 기본적인 조형요소인 동시에 정보의 의미를 지닌다. 바코드의 선은 빛에 의해 읽혀지고 그 안에 담긴 정보를 통해 존재를 증명해준다. 이 바코드는 빛을 투과시켜서 공간에 특정한 모양의 그림자를 형성하고 그 그림자는 색 바코드와 함께 공간에 개성을 부여하고 인격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그 바코드는 자연스럽게 공간의 정보를 담고 있는 역할을 거꾸로 증명 받게 된다.

작업노트 중에서

통찰성의 씨앗 ( SeeArt )

작가론 / 양주혜

통찰성의 씨앗 ( SeeArt )

김성혜

현대미술과 작가 ‘양주혜’

지금까지 미술사조를 규정하는 데에는 보여주는 ‘방식’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미술은 이 이상의 새로움은 없을 듯한 방식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타이틀 앞에 hyper를 붙여 발전성 혹은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아졌다.

발전하는 기술과도 동시 걸음을 하고 있어 이제는 4차원의 시간성을 보여주는 것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방식의 진일보라고 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 미술, 설치미술도 결국 현대미술의 큰 흐름 속에 있는 것이지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 중의 하나는 참신하고 새로운 어떤 것이다. 전에 비해 개성과 취향과 열광에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표현이 자유로운 대신 근거가 확실할 필요는 있다. 그럴듯한 것은 가차 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냉정함도 서려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들어 관객의 반응을 살피거나 참여와 같은 적극성을 구하는 작품이 많이 등장했다. 작가가 독백하는 형식에서 탈피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소통에 대한 갈망과도 관련이 있다.

확실한 것은 현재, 작가나 관람자의 입장이 표현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양주혜의 작업은 의미론적이 아닌 방법의 측면에서 이와 상통한다. 그는 감상자와의 상호소통을 중시하며 미술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공공미술(PublicArt)을 위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내버려진 공간에 대한 재해석 – 재구성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미적 효과를 달성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로서 그는 대중과의 만남과 그들과의 소통을 전시실보다도 사람 사는 환경 속에서 이루고자 한다. 그의 색점 혹은 바코드에 의한 설치로부터 공공건물에 서린 특유의 건조함 내지 쳐진 무게가 생동감을 부여 받는다. 또한 주목성을 지나칠 수 없는데, 이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주목성은 물론이고, 본연의 기능을 하는 데에도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마로니에 미술관 외벽에 설치한 ‘소요’ 작품이 있다.

유학시절, 기호를 색으로 표현하면서 시작된 양주혜의 색점은 평면에서 설치로 공간 내부에서 외부로 탄력적으로 변화해왔고, 현재는 색 띠로써의 바코드를 공간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잇다. 그는 뤼미니 미술대학의 졸업 작품이었던 회화와 페인팅한 바닥을 함께 보여주는 공간 구성 작품을 실제 ‘설치’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양주혜 작업의 특징은 감성을 담지 않는 것이다. 즉, 색 자체 – 색의 배치는 어떤 경험에 의한 소산이 아니다. 그에게 색은 해석의 코드이자 또 하나의 언어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감성의 울림보다 지(知)적인 명쾌함이 먼저 다가온다.

한편 그는 동양의 불교 사상과 기호의 조형미에 영향을 받아 그것을 공간 속에서 빛과 색으로 재구성한 작품을 내놓았으며 2001년 도자기 엑스포를 즈음하여 광장에 행사 상징물인 이래탑(利來塔)을 제작했다. 그는 오브제만을 보지 않는다. 본인의 말대로 낮과 밤-땅과 하늘의 자연 요소와 결합된 ‘열린 건축’을 추구한다.

통찰성의 씨앗 : SeeArt

‘설치미술가’ 양주혜는 한국 현대 미술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를 둘러싼 시공에 압도되는 거대한 설치 작업을 수행하면서 때로는 실내에서 소박하고 키치 적인 재미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립되지 않는 오늘날의 환경미술을 이론적으로 구축시킴에 있어서 양주혜의 작품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모더니즘의 합리성, 공공미술의 개념, 미니멀 아트의 요소를 갖추고 잇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음을 염두해 둔다.

양주혜의 작품에서의 화려함은 곱디고운 묘사에 의한 화려함이 아니다. 단지 색과 엥포르멜이 점철된 질감과 어우러져 명료하고 깔끔한 화려함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해석하여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기실,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음을 관조자의 몫으로 돌렸던 칸트의 사상에 동의하는 듯하다.

그의 작업은 주지(主知)주의 경향을 띄고 있다. 그에게 최상의 표현이란, 체계적으로 간결하게 보여주기이다. 따라서 창조된 이미지에서 번짐이나 흘림과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그는 해석의 코드를 읽어내는 방법으로 오늘날의 첨단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공공미술’을 한다

그는 스스로 공공미술을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공미술이라 하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에 설치 전시 되는 작품을 가리킨다.

그는 공공미술을 통해 1mm의 미적 환경을 대중이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또한 스스로 직접 대중과의 소통의 방법을 찾는다. 가량 공사 중인 건물 앞에 쳐진 가림막에 이미지(색점)를 입히는 작업은 대중에게 미술에 대한 인식을 친근하게 하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는 일시성을 제외하고는 크리스토의 포장을 위한 포장 작업과는 성격이 다르다. 더욱이 크리스토의 대지미술은 거대한 환경을 캔버스로 보는 시각과 주도면밀한 과정 그리고 건설적인 수행에 의미가 있다. 양주혜의 공공미술은 그 지점에서 나아가 기능성과 상호 소통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트레이드마크, ‘색점’ 의 원리

정념과 감수성을 배제한 채 캔버스에 틀을 치고 점과 색을 메운다. 파랑, 빨강, 노랑의 내막은 없다. 단지 자연스러움을 입힐 뿐이다. 입혀진 것은 곧 시간의 중첩이기도 하다.

한편 색을 활용하여 순수한 시각성의 효과를 기대한다는 측면에서 1960년대의 옵아트를 떠올릴 수 있다. 옵아트가 색 배열을 통해 착시와 왜곡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양주혜는 색을 ‘해석’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색을 ‘쓴다’라고 표현한다. 민첩하게 색점(기호)을 채우고, 흔적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반복적인 작업은 자아에게 끝없이 묻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일기를 써 내려가듯 거침없이 진행되는 동안 시간의 켜가 겹겹이 쌓이고 남는 것은 언제고 끝나지 않을 해석의 산물들이다.

작가 ‘양주혜’ 는 현재까지

양주혜는 1955년 생으로, 홍익대 조소과 75학번이다. 1976년 프랑스로 유학, 마르세이유 뤼미니 미술대학에서 수학하고 조형 예술부문 국가디플롬 (DNSEP) 취득하였다. 이후 파리 제 8 대학교 조형예술과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용을 하였으나 건강문제로 그만두어야 했고 조소를 택했고, 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점에서 무용과 조각은 비슷한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대학 입학 후 그는 학보사 생활을 하며 정체성을 찾는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유학을 떠났다. 유학 동안 조형과 판화, 회화를 자유로이 작업하며 작가로서의 발판을 다지게 된다. 유학은 현재의 그를 만드는데 귀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귀국 후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 전을 거치면서 작업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으며 1990년에는 석남 미술상을 받았다. 현재 서울특별시 조형물 심의위원이자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 교육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약력으로는 1987 현대미술관 이달의 작가 전, 1992년 프랑스 문화원 설치, 2000년 문예진흥원 ‘디아나의 노래’전, 2001 이천 엑스포 조형물 건축, 2002년 문화관광부 내 ‘빛의 시’, 2003년 마로니에미술관 ‘park-ing’등이 있다. 현재 코모도호텔 가리막을 위한 바코드 프로젝트가 진행 중에 있다.

작품 분석

양주혜의 ‘빛의 시’ 작품이 2003년 10월 문화의 달을 맞아 문화관광부 청사 외벽에 설치되었다.

이 작품은 문화관광부의 비전과 청조적 문화활동을 기원하는 데에 의의가 있으며, 공공미술 프로젝트로써 ㈜아트앤 프로젝트와 공동으로 진행한 것이다. 문화관광부 외벽에 훈민정음 언해본 21장과 25인의 한국 현대시-15인의 현대소설을 바탕에 놓고, 그 위에 12음계를 상징하는 12색을 묻혀 정사각형과 합성 시켰다. 건물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빛에 의해 드러나는 색을 통해 상승하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중앙 벽면에 수직으로 설치된 고서의 이미지와 현대적인 수평 색면 작업의 만남은 고금의 화합을 의미하며 한편 캐노피와 기둥에 12색으로 표현된 시와 소설은 문화의 다양성과 공존을 상징하는 것이다. 더불어 12색이 의미하는 12음으로 실제 연주가 가능하게 한 것은 행정부처의 보다 진취적이고 활발한 움직임을 기대하는 것이다.

시각적인 효과로부터 행정부처의 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이 우호적으로 전환되는 것은 미의 달성만큼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양주혜의 ‘빛의 시’는 문화관광부라는 특정 건축물을 위해 헌정 되어진 한국 현대미술사의 첫 작품으로 기록되어 질 것이다.

‘바코드’ _ 2002 이후

그는 색점 작업의 연장선으로 바코드를 도입하였다. 빛에 의해 색 점이 인식되면서 내포된 시공간적 의미가 드러나듯이 바코드 또한 광선이 작용하는 감지기를 통해 정체성을 부여 받는다. 따라서 그의 바코드는 하나의 예술품으로써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바코드 작품은 미니멀 적 성격이 강하다.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와 색점을 찍을 때와 같이 색채의 배열에 정념은 배제된다. 색점이 모여 이루는 리듬감 내지 아름다움으로부터 취할 수 있었던 포근한 장식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색점 작업에서와 같이 바코드 또한 우리의 환경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건물 외벽이나 장막에 바코드를 입힘으로써 빛에 의해 변화하는 작품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레스토랑 내부 컨셉을 바코드로 통일시킨 예가 있다. 바코드가 설치된 공간에 빛의 흔적을 새기고, 테이블의 소품에도 바코드를 넣음으로써 레스토랑은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예술품을 담고 있는 집이기도 하다.

‘순환과 윤회’ _ 2000년 이후

그는 작업에 있어 감성적인 부분을 허용치 않으며, 본질적인 완전성(정당성)을 추구한다. 따라서 도상학적(유형의 형상에 대한 비교/연구)으로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는 것을 찾게 되었고, 조형적 기호와 경건한 사상으로 이루어진 불교 경전 – 반야심경과 화엄일승법계도를 도입하게 된다. 원형 구조로 이루어진 반야심경의 글자를 색점으로 지우는 것을 반복하는 작업이 색즉시공공즉시색의 가르침에 답하는 것이라면, 화엄일승법계도는 수적 질서에 의해 만들어진 통로를 따라 관객이 직접 체험하며 법전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회의 조형적 방식은 원형과 공간적 선형으로 대비된다.

프로젝트에 화엄일승법계도를 투입시킴으로써 환상적 공간을 제시한다. 지하철의 순환은 법전에 내제된 삶의 순환성에 빗댈 수 있다.

‘색점’ _ 1985년 이후

양주혜의 ‘색점’은 철저히 빛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빛에 의해서만 생명력을 얻고 시공간적 깊이를 누린다. 그는 색채의–색채에 의한-색채를 위한 감성의 개입을 철저히 억제한다. 색점에 특별한 의미는 작가에 의해 입혀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관람자의 눈은 그것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은 색점이 모여 이루는 큰 전체에서 우리는 중첩된 시간과 지루함 없는 반복성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적정선이기도 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그림을 ‘쓴다’라고 표현한다. 즉 색점에 또한 그에 의해 ‘쓰여진’(그려진 것이 아닌)것이다. 캔버스에 그리드를 치고 칸을 메워나가는 동안 감정이나 편견은 이레 작업에 관계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에게 작용하는 색채의 소리를 캔버스에 담는 것이다.

색점 찍기는 본래 평면에서 시작하였다. 작가는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 평면을 뚫고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입체로써 달성했는데 그것은 곧 설치 작업이기도 했다. 설치로써의 색점은 캔버스에서 벽으로 – 내부에서 외부로 – 자신에게서 대중에게로 – 미적 추구에 실용성이 더해짐으로, 표현 방식이 탄력적으로 변모한다.

가령 그는 공사 중인 일산방직사옥을 가린 장막에 색점을 입혀 건조하고 딱딱한 환경을 아름답게 재구성하였고, 마로니에미술관 외벽을 색점으로 장식하고 주목성과 쾌적함을 창출해냄으로써 잠재적 관람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했다. 또한 설치된 장소와 목적에 따라 그의 작품은 명백한 공공미술(public art)로 읽혀진다.

비평 및 정리

나의 비평에 앞서 발표된 양주혜 편론에 대한 정리를 하려는 것은, 이론가의 분석을 통해 작가와 작업의 성격적 특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해 보기 위함이다.

김홍희는 양주혜 작업에서 ‘양면성’을 발견한다. 그(김)는 양주혜를 가장 평범하면서도 개성있는 작가로 인식하고, 평면-입체, 순수미술-응용미술, 남성성-여성성이 동시에 묻어나는 작품에서의 양면성을 긍정적이고 도시적인 병치적 성격으로 간주한다.

한편 오광수는 양주혜의 설치를 열린 회화로 보며, 색점이 지니는 일시 반복적인 성격에 주목한다. 또한 그(오)는 색 점의 증식을 삶의 영원성으로 이해하고 이처럼 일시성과 영원성이 공존하는 상황적 아이러니를 양주혜 작업의 정당성으로 해석한다.

강태희는 양주혜의 색채의 배열을 음악적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색채가 작곡(음악)에 수단이 된다고 주장한 칸딘스키의 이론을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는 단지 색점만으로 당대의 소리를 내는 데는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또한 작품에 현저한 메시지가 담겨지기를 기대한다.

나의 생각은.

양주혜의 작업은 평명에서 시작하여 공간으로 확장한다. 평면을 뚫고 들어가고픈 욕구에서 시작된 설치 작업은 곧 도시와 자연에서 실현되었고 현재는 공간 안팎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 세상의 곳곳이 그에게는 작업 무대가 된다. 하지만 주도 면밀한 해석 없이 무대가 빛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령, 미술관 외벽을 싸고 있는 색 띠는 미술관을 주목하는 데에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다. 색띠 하나에 거창한 사유 따위는 들어있지 않다 그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작품이 공간 속에서 아름다울 수 있는 적정점을 찾는다.

작업이 색 점에서 바코드로 전환되면서 그는 장식성보다는 간결한 보여주기의 태도를 견지하는 듯하다. 색 점을 해석의 코드로 보고 그것을 ‘쓰는(write)’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바코드는 현대 작가들에 의해 널리 사랑 받는 대상이다. 또한 물질만능시대를 지적하는 현대인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바코드이기에 풍자적으로 회자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양주혜는 바코드가 가진 근본적, 존재론적 가치 즉 ‘정체성’과 ‘고유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형태와 생김새는 빌리되 색 점에서도 그러하였듯 바코드에 의한 이야기는 없다. 아쉬운 것은 양주혜의 바코드가 시각적인 만족, 즉 아름다움의 조화는 있을지언정 기존 그의 작품에서 빛났던 해석의 미학은 결여되어 보이는 것이다. 빛과 색과 공간을 기호로 표현하여 지적 쾌감을 안겨주었던 작업들 위에서 현재의 바코드가 깃털처럼 날고 잇다. 소재를 탓해도 좋을 이런 개인적인 아쉬움은 접고, 작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한다는 작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는 공간 속에서 살아있음을 – 살아감을 – 나아감을 잊지 않는다. 그는 내-외부에서 타인이 발견하지 못하는 1mm의 터를 발견하고 구성할 줄 아는 사람이다. 법전의 가르침인 순환을 순환하는 지하철에서 보여주고, 공공건물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다. 양주혜의 바코드는 전시실에서 나와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 공간을 밝히는 빛과 함께 예술 작품으로써 당당한 힘을 발휘한다.

그는 관람자와의 능동적이고 상호적인 교감을 추구하며 대중과, 사회와의 소통을 근간으로 작업에 임한다. 대중이 보지 않는 공공미술이란 무의미하며, 그는 적재적소에서 대중과 만나기를, 대중에게 소개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부단한 진취력으로 작가 양주혜는 기실 한국 현대미술사와 함께 다져질 환경미술과 공공미술에 있어 건강한 씨앗과 같다.

참고 문헌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 칸딘스키, 권영필 옮김, 열화당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장 프랑소와 리오타르, 권영필 옮김, 현대미학사, 2000

독일의 현대미술여행(백기영) www.kunsttrip.net/critic2.htm

Metaphor, 심명호 역, 서울대학교 출판부

현대미술의 개념, 니코스 스텐고스, 문예출판사, 1995

시간이 축척되는 회화적 공간

시간이 축척되는 회화적 공간

강태희 (미술원 교수)

색점을 그려나가는 작가, 또는 건물이나 건축 공사장의 가림막틀을 설치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양주혜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작업실에는 최근에 완성된 것들과 또 진행 중인 작품들이 가득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중 제일 먼저 내 시선을 끈 것은 지금은 거의 사라진 아기 포대기나 낡은 타월, 침대보, 또는 조각이불을 사용한 작품들이었다. 작가는 이런 일상주변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쓸 만큼 쓰고 나서 버리지 않고 ‘재활용’한 것인데, 그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것은 알록달록한 5센티미터 가량의 정사각형 천들을 이어 붙여 작가의 증조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조각이불이었다.

그는 이 위에 앞 뒤 양면을 색점을 그려놓았는데 바느질 솔기가 드러나서 생생한 재질감이 살아나는 뒷면이 더 보기 좋았다. 더 돌아보니 낡은 책상과 다리가 망가진 걸상도 색점을 뒤집어 쓴 채 놓여 있다.

폐품 이용이라도 하듯이 이렇듯 세월의 켜가 앉은 익숙한 물건들을 작품으로 변화시키는 작가의 자세랄까, 마음가짐을 언뜻 궁리해 보았다. 양주혜는 예술에 대해 거창한 목표를 설정하거나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았다. 또 미술이 인생과 유리된 특별한 것이라거나 또는 이론적인 지식이 작업에 반드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집요하게 그려온 색점은 어떤 경로로 그의 주된 매체가 되었는지, 색점은 그에게 무엇에 도달하는 통로인지, 그것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내게 떠오른 의문이었다. 이 의문들을 기본으로 그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격자를 통한 새로운 질서의 구축

양주혜의 작업은 크게 평면, 입체, 설치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그의 평면은 여러 켜로 중첩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사각 캔버스의 형태를 근간으로 한 회화에 가까운 작업이기 때문에 편면으로 구분한다.) 이 세가지 장르에 공통되는 요소는 바로 격자의 구조이다.

격자란 말할 것도 없이 공간을 분할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주어진 면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틀이다. 격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모더니즘의 표상이다. 그것은 몬드리안으로부터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을 거쳐 도널드 져드와 솔 르윗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가들이 실험하고 의존해 온 구조이며, 한편으로는 정신성이나 서술성에 배제하는 과학이나 논리의 표상인 물질주의를 나타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이나 정신 등을 대변하는 영적인 것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격자는 반서술, 반역사, 반발달의 패러다임으로 현대미술에 굳건히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이다. 양주혜는 외견상 이런 패러다임에 동숭하고 있지만, 보다 단순하게 색점들을 배열하기 위한 공간분할의 바탕으로 격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격자는 초등학생의 칸이 그려진 공책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이 공간의 출처는 그림보다는 글자였고,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와 격자의 글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유학 시절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읽어야 하는 고민을 마주하고 그는 개별 알파벳마다 고유한 색을 정한 다음 글자 위에 색점을 찍어 레포트로 제출하는 고육지책을 썼다. 이렇게 보면 그의 색점은 글을 그림으로 바꾸어 놓는 과정에서 탄생했고, 격자는 그림의 전제조건이자 중요한 일부가 된 것이다. 그의 작업이 격자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격자가 다 같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은 크기도 다를뿐더러 그 형태와 규칙성이 뚜렷이 보존된 것부터 상당히 무시된 것까지 다양한데, 그 중 격자가 가장 뚜렷이 보존되어 있는 좋은 예가 반야심경을 실크 프린트한 위에 색점으로 글씨를 가려 나간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격자인 전체 화면은 일단 책의 페이지 크기대로 다시 나눠지고 활자의 배열로 또 더 세분되어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한다. 이런 자판 위에 흰색,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주홍, 연두, 보라 등 각가지 색점들이 찍혀있는데 모든 글자가 다 지워지고 가려진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반야심경은 읽히기보다는 보는 불경, 활자체는 글보다는 그림의 일부로 바뀐다.

진정한 독경은 자구의 해석에 매달리기보다는 굳이 읽거나 보거나 하는 구별이 필요 없는 무애의 경지에 도달함이라는 메시지일가. 반면 격자가 거의 무시되고 색점에 의해 가려지는 경우의 예는 일일이 예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격자는 그 바탕에 엄연히 존재한다. 한편, 격자 자체가 작품화한 경우를 입체작품에서 발견한다. 격자와 색점이 찍힌 아크릴 상자를 번갈아서 쌓아 놓은 미니멀적인 입체물이나, 호암미술관의 ‘빛과 색’ 전의 설치 작품(1994). 또는 철봉과 아크릴 판을 결합한 작품(1995)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 경우에는 같은 단위의 반복과 중첩이라는 효과를 내면서 구조로서의 격자가 전면에 부상한 경우이다. 또한 설치작업에서 가림막의 틀로 사용한 격자도 그의 격자에 대한 집착을 말해주고 있다.

색점과 색면의 어법들

격자와 쌍벽을 이루는 양주혜의 모티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색점이다.

그의 작업의 단초가 글자, 그것도 해독을 포기한 글자라는 사실은 그의 작업 전체에 상당한 의미가 있는 듯 하다. 즉 글자를 가리고 지움으로써 자모의 단위로 단절시켜 의미의 발생을 억제하려는 충동은 형상의 발생을 저지하면서 점과 선 등으로만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와 맞물려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은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으며 대신 그림을 ‘써내려’ 간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말하지 않고 표현하고자’하는 그의 시도를 반영한다. 즉 그는 색점을 통해 이미지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구현하고자 하며 이들은 언어이기보다는 ‘발성’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것은 대개의 비구상회화에 해당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색점이 규격과 단절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여느 추상화와는 달리 반복과 일탈의 구조나 리듬에, 다시 말해 음악에 가까이 다가간 특성을 보인다. 따라서 그의 격자는 오선지와 흡사한 역할을 맡고, 그 음악은 연속적인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이며 싱코페이션의 리듬이 주조이다. 그의 색점들은 크기나 색채가 다양하다. 쉽게 점이라고 했지만 어떤 것은 작은 단추만한 것부터 바둑알에서 손바닥만한 크기도 있으며 큰 것은 색점이라기 보다는 색면으로 불러야 할 것도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그리고, 지우고, 붙이고, 찢어내고 하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통해 제작되기 때문에 격자와 색점이라는 단순한 배합을 넘어선다.

색점 자체도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다. 80년대에는 드로잉적인 요소가 강하고, 겹치고 번지는 효과를 낸 화면이 더 많았다면 90년대에는 보다 규칙적이고 탄탄한 구성에 관심을 쏟고 있다. 즉 초기에는 혼합되고 모호한 색점의 결합이 전체적인 어떤 인상을 추구했다면 최근에는 색점 자체의 독자성과 형태나 구조 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양주혜의 작업을 격자에 분절된 색점의 반복 또는 비서열적이고 올 오버적인 화면 구성이라고 요약하면 이는 바로 패턴 작업과 연결된다.

패턴의 정의는 ‘표면을 통일되게 덮기 위해 특정 모티브를 반복하는 것’인데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는 ‘통일되게’이다. 그의 작업에는 단일한 색점이나 색면을 반복하여 통일된 화면을 이루는 것도 잇는 반면 그렇지 않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양주혜의 작품은 1970년대 후반에 반모더니즘이나 반남성-엘리트주의로 태동한 패턴과 장식과는 발생과정부터 다르고, 그의 색점도 순수한 패턴으로 머물기에는 너무 다양한 모습을 지녔다. 그들은 단순한 색점에서부터 운필의 궤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색면 또는 드로잉의 흔적을 간직하고 잇는 반복된 빗금까지 여러 가지가 있으며 더구나 이들이 콜라주 또는 데콜라주되면서 보다 회화적이고 비정형적인 특성을 강하게 내비추기 때문이다. 한편 대개의 패턴화에서 시간의 흐름은 순차적인 반복으로 드러나는 데 비해 양주혜에게는 시간이 흐르기보다는 쌓이는 것으로 구현된다. 즉 그의 화면은 여러 겹으로 층층이 물감을 찌고, 바르고, 뭉개고, 또 덧칠하고 하여 시간이 누적된 공간이다.

그의 작업의 또 하나의 특성인 물질성의 강조도 패턴화로부터 멀어지는 선택이다. 그가 사용하는 천의 재료나 두께가 평면과는 거리가 먼 것과 굳이 캔버스의 틀로 이들을 고정시키지 않는 전시 방법, 또는 화면의 앞∙뒤 양면을 다 활용하는 점이 그의 물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흔히 프랑스판 미니멀 아트로 알려져 있는 쉬포르/쉬르파스는 그가 유학한 마르세이유가 본거지로 이들은 캔버스 자체의 물성을 작품의 일부분으로 간주하여 틀을 매기지 않은 채 벽에 커튼처럼 걸거나 늘어뜨리는 방법을 택하거나 또 염색으로 물감이 천에 스며들게 하고 도장 찍는 식으로 모티브를 반복하기도 했다. 양주혜는 그들 미학의 모든 면을 수용하지는 않지만 물성의 강조에는 공감한 듯하다. 어쨌든 패턴화의 조건을 지니면서도 그렇지 않은 특성을 보이는 양주혜의 작업은 전반적으로 장식적인 효과를 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는 특히 간단명료한 색점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공사장 가림막틀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인생과 예술의 결합

격자, 색점, 패턴 등이 양주혜 작업의 특성을 논할 수 잇는 기본적인 어휘라면 설치는 그의 작업의 중요한 한 분야로 따로 논의될 만하다. 그의 설치는 색점 또는 색면들이 가장 큰 사이즈로 그려지는 분야이다. 설치작업이라고 해서 색점 모티브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가 맨처음 설치에 눈을 뜬 것은 다니엘 뷔랭의 내한 전시(1998)를 도우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뷔랭 이전에 그는 설치 쪽으로 접근한 작품을 선보였다.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달의 작가』전에 출품된 작품은 그 스케일과 비정형의 캔버스 형태, 겹치고 늘어뜨려진 화면, 그리고 그림 틀의 부착 등으로 평면에서 환경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뷔랭은 『통로 : 다섯 색의 공간』이라는 제목으로 프랑스 문화원에서 설치전을 열었는데, 양주혜는 그 이듬해에 뷔랭이 사용하고 난 천에 흰색을 덧칠을 한 다음 줄무늬가 어렴풋이 보이는 면 위에 필획이 강조된 커다란 색면을 그려서 힐튼 화랑의 벽에 걸었다. 이와 함께 열린 프랑스 문화원에서의 전시는 건물의 정면을 가리는 가림막과 내부의 구조물로 이루어졌다. 남이 쓰고 난 천을 재활용한 것도 그다운 선택이지만 여기서도 격자와 유사한 뷔랭의 반복되는 줄무늬가 시선을 끌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원 실내의 전시는 뷔랭의 그것처럼 공단을 재배치, 변화시키는 일시적인 구조물인데 역시 색점으로 장식하였다. 그러나 양주혜에게는 뷔랭의 줄무늬 작업의 개념성과 확립된 제도권으로서의 전시공간 자체에 대한 비판은 없어 보인다. 그의 미술로 건물을 싸거나 공간을 재구성했을 때 그 공간의 형태와 기능의 변화에 주목한 듯하다.

양주혜의 설치작업은 실용적인 목적이 두드러진 일신방직사옥 신축공사장 가림막이나, 용인자연농원 울타리 작업 등 공사현장 가림막 틀과 에슬링겐 시립미술관 ∙ 표화랑 작업 등 미술관 내외에서의 미술로서의 “설치”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아마도 실질적인 이유에서 전자에서는 색점 또는 색면을 보다 크고 명료하게 반복하는 선택을 한다. 공사장이든 미술관이든 모든 설치는 한시적이다. 그러나 미술관이 설치가 인위적인 전시기간에 맞물리는데 반해 공사장은 그렇지 않고 너저분한 모습을 가리고 또 안전사고도 예방하는 효과를 내면서 행인이나 공사장 인력들에게 바로 가까이에서 미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인생과 예술의 결합이며 미술의 기능과 의의를 되새겨 볼 수 잇는 좋은 계기가 된다. 일신방직 사옥의 경우(1990)작품의 지속기간은 6개월여였지만 콘크리트 구조물이 올라가는데 따라 가림막이 순차적으로 설치 또는 해체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도 이 작업의 프로세스적인 면을 보여준다.

양주혜의 옥외 설치작업은 체제 비판적인 뷔랭이나 미술의 사회적, 미학적 기능과 의미를 점검하는 크리스토의 설치와는 외견상으로는 유사한 점이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사뭇 다르다. 모티브를 반복한다는 점에서는 뷔랭, 아름답다는 면으로는 크리스토와 비슷하지만 그의 설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지에 이른 색채의 배열

양주혜에 대해서는 이미 적절한 관찰과 평가가 있어왔기에 나는 나름대로 이제껏 덜 얘기되었던 부분,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믿어지는 면을 살펴보았다. 내가 보기에 양주혜는 진지하고 성실하게 작업하는 작가이며 무엇보다도 예술과 자신의 작업에 대한 소박하고 소탈한 태도를 가졌다. 색점과 색면으로 꾸려가는 작업도 이제는 경지에 이른 느낌이며 상당수는 아주 아름답다. 서두에서 나는 색점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를 알고자 했다. 이미 관찰한 바처럼 그들이 언어보다 더 생생한 소리 그 자체라면, 또는 언어 이전의 분절된 자모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면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 음악적 효과? 만약 그가 이를 통해 음악의 경지에 이른 색채의 배열을 의도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그 길을 찾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색점이나 색면의 조합으로 낼 수 있는 소리는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 반향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음악과 미술을 결합하는 공감각의 문제는 낭만주의 시대부터 시작되어 19세기말에는 칸딘스키나 스트라빈스키 등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유서 깊은 분야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미술과 음악이 각기 난해하고 복잡해지면서 그 관심은 스러진 편이다. 그렇다 해도 양주혜가 이 방면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하등 문제 가 될 것은 없다.

그것은 여전히 많은 미술가들이 다다르고 싶어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당대의 소리를 진솔하게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색점으로만 말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더불어 그에게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의 메시지가 부족한 점이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에서 그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어법을 구사하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이른 측면에서 볼 때 최근 『피악(Fiac ’96』에 출품한 「Animas 255」와 이와 유사한 현재 진행중인 새 작품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들을 통해 그가 자모에서 더 나아가 단어와 문장으로 말하는 연습을 시작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형태로 가장 보편적인 것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시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지켜보고 싶다.

흔적을 남기고 지우는 조형놀이

흔적을 남기고 지우는 조형놀이

양주혜 7.17~9.13 경주 아트선재미술관

지난 5월 금산갤러리에서 ‘시간세기’로 전시회를 가졌던 양주혜가 3개월 만에 경주 아트선재미술관에서 ‘흔적 지우기’라는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 번에는 행주∙침대보∙포대기 등 여성적 ‘발견물’ 위에 색점을 찍은 오브제 작품을 전시했고, 이번에는 《반야심경》글자들을 색점으로 지운 설치작업을 선보이고 잇다. 전자는 흔적 만들기요 후자는 흔적 지우기이지만, 이 둘은 모두 ‘시간 세기’로써 흔적을 조형화하고 잇다는 점에서 동일한 창작 행위로 볼 수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도를 설법한 《반야심경》은 총 2백74자의 낱말들을 구심적으로 배열하여 전체 내용을 한 페이지에 담은 짧은 불경이다. 양주혜는 2백74자의 낱말들을 하나씩 읽어 가면서 그것을 색점으로 지워가는 시간세기 행위를 2백74번 거듭, 지워진 2백74장의 페이지들로 같은 원형 구조를 반복하는 대형 《반야심경》을 만들었다. 투명한 망천 위에 낱개의 글자 단위로서 환원된 2백 74장의 《반야심경》을 부착시켜 거대한 크기의 경전을 만든 후, 그것을 천장으로부터 내려뜨려 전시장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직 구조물을 설치한 것이다. 양주혜는 망천을 사용하여 종잇장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한편, 지워진 텍스트의 흔적을 누출시키고 그것을 일으켜 세워 놓음으로써 읽는 경전을 보는 경전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양주혜는 색점으로 텍스트를 지우는 동시에 그것을 패턴화한다. 색점으로 지워진 경전은 텍스트이자 패턴화된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이번의 《반야심경》뿐 아니라 양주혜의 모든 그림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계에 존재하고 있다. 자신이 세운 일정한 법칙과 체계에 의해 시간을 세어 가며 원고지를 메꾸듯 한점한점 찍어 나가는 그녀의 낙점 드로잉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중간 형태인 텍스트-이미지인 것이다.

그녀는 몸으로 그리고 쓰는 낙점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흔적을 화면에 각인시킨다. 그러나 실존적 낙점의 바로 그 순간,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조형이 태어난다. 실존이자 조형이며 텍스트이자 이미지인 색점들, 그것이 흔적을 만들기도 하고 지우기도 한다. 그녀는 지우는 행위로 흔적을 만들며 흔적을 만듬으로써 그것을 지우는 것이다.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이러한 흔적 남기기와 흔적 지우기의 동일화 과정 반복이 양주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색점 찍기의 실체이다.

그리기와 지우기의 시공적 간격을 조형화하는 양주혜의 색점 찍기는 차이들의 흔적과 그 간격의 유보를 통해 의미의 부재를 시사하는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유추시킨다. 데리다가 차연과 그 흔적의 제시로 기존의 의미 질서를 전복하듯이, 양주혜는 흔적을 남기고 지우는 조형 놀이를 통해 역사와 전통에 개입하는 여성적 간여를 시도한다. 지난번 ‘시간세기’에서 여성적 발견물에 자신의 흔적을 가함으로써 여성의 역사 속에 자신을 위치시켰다면, 이번 ‘흔적 지우기’에서는 고전 텍스트를 이미지화 하고 시각을 변화시키는 낙점 행위오서 부계적 신앙 전통에 끼어 드는 것이다.

<김홍희 ∙ 미술비평>

빛의 시 – 이것은 바코드가 아닐까요 - 집의 숨 집의 결_ 영암도기문화센터특별전

양주혜 Juhae Yang

빛의 시 – 이것은 바코드가 아닐까요?

Poem of Light – Is This Not a Bar-Code?

빛의 흔적을 새겨두고 싶습니다.

투명, 반투명, 불투명 재료를 이용하여 ‘안’과 ‘겉’의 방향성을 낯설게 할 뿐만 아니라, 손대지 않은 투명한 부분을 통해 빛의 흔적이 읽혀지기를 바래봅니다.

한편, 스캐너가 바코드를 인식하여 물체의 정체성을 구별해내는 것처럼, ‘우리의 집’에 부여한 이 바코드도 자연의 빛이 스캐닝 하여 ‘예술품을 담아내는 집’ 이라는 정체성을 구별해 내 줄 수 있을까요?

봄을 기다리며 긴 겨울을 보낸 끝자락에 해 본 또 하나의 쓸데없는 망상입니다.

I would like to carve the traces of light and hope it to be read.

I wish that transparent, translucent, and opaque materials used in my work would unfix the boundaries between inside and outside, and put the traces of light in relief.

Would the rays of light scan my work and identify it as a ‘house of art’ as if a laser scanner discerns the product by reading the bar-code.

It was a little vain game that I played at the close of long winter waiting for spring.

양주혜의 작품세계 : 양면성의 미학

양주혜 작품세계 : 양면성의 미학

-김홍희

색점찍기와 설치 작업으로 널리 알려진 양주혜씨가 지난달 「갤러리 현대」(9월 1일-9월 9일)와 프랑스 문화원(8월 20일-9월 17일)에서 6번째의 개인전을 가졌다.  회화, 오브제, 설치등 그의 작품 세계를 고루 보여주는 이번 가을 전시회를 계기로 그는 프랑스 문화원 건물과 갤러리 현대 빌딩의 정면을 동시에 가리는 이색적인 가림막을 설치함으로써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설치 미술가로서의 역량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다.양주혜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작가이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같은 선긋기, 점찍기, 빗금칠하기로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평범하고, 그 단순하고 친숙한 모티브를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개성있는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더구나 그 같은 점과 같은 선과 같은 색으로 캔버스 작품도 만들고 오브제도 만들고 설치 작품도 만든다.  미술의 손처럼 손길 닿는 것마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놀랍게도 점과 선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조형의 단위로 그 자신 특유의 스타일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한번 본 사람이면 누구나가 그것이 양주혜의 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
도상을 만드는일이 아닌 추상 작업으로, 또한 누구누구의 작품에 비견될 수도 있고, 이 「이즘」저 「이즘」에도 속할 수 있는 그러한 평범한 모티브와 반복의 구조를 가지고 어떻게 그는 독자적인 조형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일까?양주혜의 작품세계는 복합적 차원의 양면성(ambivalence)으로 이루어진다.
이미 클리쉐(cliche), 또는 고전이 된 듯한 양면성 개념은 현대미술의 골자를 이룬다.  그것은 양면의 성질을 함께 소유하기 때문에 단일함의 명료성 대신 이중적인 것으로서의 애매성을 지니며, 동시에 테제와 안티테제의 양면을 절충적으로 종합하기 때문에 순수성 대신 잡종성을 보유한다.  뒤샹의 「넌센스」, 케이지가 말하는 「비결정성」, 앤디 워홀이 구축한 「이미지 초상」, 백남준이 창출하는 「전자 영상」등은 모두가 애매성과 잡종성의 특성을 갖는 양면성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러한 세기적 아방가르드들이 구사하는 양면성이 선언적인 동시에 반예술을 위한 무기로 작용했다면, 양주혜의 양면성은 그의 예술에 특징을 부여하는 긍정적인 미학 개념으로 등장한다.

평면과 입체의 양면성

양주혜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 사이에 존재한다.  2차원적 화면이 부조적 양감을 보유하는 한편, 3차원적 구조물은 회화의 연장으로서 평면작업에서 출발한다.
그리는 일이 입체 작업으로 연결되고, 입체를 만드는 일은 그리는 일로 시작되는, 그에 있어 그리기와 만들기는 서로가 시작도 끝도 아닌 순환적 고리를 형성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만들기로 그리기를 시작한다.  배접이나 퀼트의 방법으로 우선 캔버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때부터 양감을 부여받은 그의 그림은 덧칠하기와 덧붙이기의 공세에 의해 새로운 조형의 세계로 진입한다.  칠하고 그위에 바르고 그위에 다시 칠하고 또 바르고… 그뿐 아니라 그는 바른 것을 벗겨내어 축적의 흔적, 또는 시간의 깊이를 드러내 보인다.  배접으로 고정된 격자 모양의 실가닥들이 그위에 덧붙여진 표면들을 벗기면서 스스로를 노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벗겨진, 상처난 화면들은 다시 이물질로 장식된다.  예전에 그리다가 처박아 둔 그림들을 오리거나, 질감있는 종이를 찢어 붙인다.  이러한 콜라주와 데콜라주의 끝없는 대화 속에서 점과 선과 면으로 구성되는 그의 입체적 회화 세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때로는 자명한 3차원적 물체가 콜라주로 화면에 부착되기도 한다.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이달의 작가전」에 출품한 벽면 작업은 색점으로 장식한 고물 창틀을 벽면화로부터 돌출시키고 있다.  그러나 돌연함과 낯설음을 불러일으키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컴바인」회화와는 다르게, 양주혜의 돌출은 화면과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환경을 창출하는 회화의 공간적 확장이다.
이로부터 그의 설치 작업의 미학이 도출된다.회화로부터 돌출된 부위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그것이 구조물이 되며, 구조물이 공간 속에서 환경을 창조할 때 설치가 된다.  그의 환경설치물은 결국 회화의 연장인 동시에 회화로 환원되는, 회화적 구성으로서 설치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설치 작업이 화랑 내부를 벗어나 외부 공간으로 확산될 때 그것 역시 하나의 회화적 연장으로서 그것을 통해 회화 혹은 예술의 생활화가 이루어진다.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의 양면성

양주혜의 외부 설치 작업은 고급 예술의 대중적 확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소통이라는, 탈중심을 위한 현대미술의 대명제를 충족시킨다.  대형 그림인 동시에 그 그림이 가리는 건물 자체를 초거대 입체물로 변용시키는 거리의 예술, 건물 가림막은 그것과 마주치는 무심한 행인들을 예술외적 대중(public)에서 감상하는 관객(audience)으로 전환시킨다.  대형으로 확대된 옥외 캔버스화는 문맥을 벗어난 공간감과 스케일의 낯설음으로 보는 이의 감성을 깨어나게 하고, 벽화나 야외 조각과는 전혀 다른 상이함의 충격으로 새로운 지각 경험을 유발하는 것이다.  지난달 개인전에 선보인 프랑스문화원 건물 정면 가림막은 그가 과거에 설치한 여느 옥외 작업과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임으로써 관객에게 또 다른 지각 경험을 선사했을 뿐 아니라, 양주혜 자신의 예술 세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번의 가림막은 1989년 제4회 개인전 당시 설치하였던, 동일한 프랑스 문화원 건물 현장사진을 재활용하였다.  사진작가 강운구씨가 촬영한 3년 전의 가림막 현장 사진은 주위의 나무와 이웃 건물들을 함께 포착한 길거리 풍경 사진이었고, 양주혜는 그 사진 이미지를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하여 60배로 확장, 대형 캔버스에 전시하여 그것을 현 가림막으로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색점으로 프린트하여 만들어진 예전의 추상화 가림막이 지금의 재현된 거리 풍경 가림막속에 재등장하여 스스로를 반복하면서 동일 건물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다.  양주혜는 지난날 자신이 그렸던 그림 조각들을 콜라주로 재사용함으로써  평면의 화면에 시간의 깊이를 더하였듯이, 현장 속에 과거의 현장을 되살리는 이러한 가림막 설치 작업을 통하여 과거를 현실화, 혹은 시간의 추이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시간의 축적이라는 면에서도 그의 설치작업은 회화연장선상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가림막 제작 과정을 통하여 회화적으로 축적되는 색점의 경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즉, 현 가림막의 색점은 색점 찍힌 과거 가림막 사진의 프린트 위에 추가로 색점이 칠해지고 그것이 컴퓨터로 확대된 후 그 위에 다시 색점이 칠해진 중첩과 축적의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 하나의 색점들은, 이미지화된 사진 이미지 자체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반복하는 재현적 이미지인 동시에 하나의 현실적 이미지인 것이다.  결국 양주혜가 처음 선보이는 재현적 작업은 재래적 개념의 형상 또는 구상이 아닌 이미지 산출 작업으로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재현 작업을 통하여 재현(representation)과 제시(presentation)라는 현대 미술의 주요 개념을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미지 산출 작업이 많은 경우 최신의 기술을 요구하게 마련이지만, 이번 가림막은 첨단의 컴퓨터 확대 그래픽 기술을 이용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무려 220개의 디스켓이 사용된 폭 13미터, 길이 17미터의 이 초대형 가림막은 옵셋 인쇄나 실크스크린이 주지 못하는 전자적 특수 영상 효과를 창출하는데, 이는 양주혜의 등록상표인 색점이 컴퓨터 기술의 도입으로 전자화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전망을 예고하기도 한다.  양주혜는 이 새로운 전자적 색점과 재현적 이미지의 탄생을 강조하려는 듯이, 전시 기간동안에 바로 옆 갤러리 현대 건물 정면과 측면에 예전처럼 추상적 색점 프린트 가림막을 설치하여 신, 구 두 스타일의 가림막을 동시에 전시함으로써, 컴퓨터 이미지와 프린트 이미지, 재현 이미지와 추상 이미지의 효과적인 동시 대비를 가능하게 하였다.도시 미화, 또는 예술의 대중적 보급이라는 문맥에서 신축 공사현장 가림막은 좀 더 적극적인 생활 예술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사장 가림막 틀은 양주혜자신이 설명하듯이 『장기간 동안 도시 공간속에 설치되어 시민들의 시선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가림막 자체를 작품화하자는 의도로 제작』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행위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무시할 수 없는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양주혜가 왜 가림막 그림을 그리느냐, 그것이 개인적 예술행위냐, 공적인 도시 미화 작업이냐, 즉 그리기 위해 가리느냐, 가리기 위해 그리느냐 하는 가림막 존립의 당위성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크리스토는 환경 미화가 아니라 자연의 변화 내지 익숙한 것의 신비화를 위해 싸고 가린다.  싸는 것이 그의 미학이며 예술 의도이다.  양주혜의 경우는 그러한 예술적 필연성에 의해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가리고 싶은 욕구나 가려야 할 필요에 따라 자의적 결단으로 가리고, 그것을 위해 그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주혜의 공사장 가림막은 그리기와 가리기가 일치하는 하나의 예술적 행위가 아니라, 가리기 위해 그리는 도구적인 예술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양주혜의 가림막은 자신의 예술로 생활을 장식하는 동시에, 생활속에 침투함으로써 자신의 예술 영역을 넓히려는 강한 예술적 확산 의지의 반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순수예술의 대중화를 단지 공사장 가림막같은 대규모 프로젝트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커튼, 방석, 식탁보, 깔개같은 생활용품에 그 자신의 점과 선의 흔적을 남기거나, 공중전화 카드에도 자신의 모티브를 새겨넣어 「양주혜 전화 카드」를 제작하는, 디자이너 또는 응용 미술가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양주혜의 예술은 이와같이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역할을 함께하는 기능상의 양면성도 갖는 것이다.
양주혜의 외도, 또는 일시적이지만 지속적인 순수미술로부터의 일탈은 추상 또는 모더니즘의 형식적 한계를 반추하는 동시에, 자신의 예술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전환과 도약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점과 선과 색이 화폭을 떠나 우리들 곁에서, 생활 속에서, 거리에서 살아 움직일 때에 그것은 새로운 힘과 혼으로 활성화되며 삶의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산천과 하늘을 색으로 점찍어 온 지구를 색점의 도열로 물들이는 것이 그의 예술적 포부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면성

양주혜 예술이 내포하는 양면성은 평면과 입체라는 형태상의, 그리고 순수와 응용이라는 기능상의 특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양주혜의 예술은 남성적임과 여성적임을 동시에 표출하는 양성의 감수성을 갖는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 왜 성을 거론하는지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태리 「트랜스아방가르드」의 주도자 보니토 올리바씨의 주장처럼, 예술 작품은 언어와 형상으로 대상화되면서 그것을 만든 예술가의 전기적 성격이 잊혀지기 때문에 예술에는 성이 있을 수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이란 그 작가의 이념과 가치관의 반영이듯이, 그 작가가 여성일 경우, 여성으로서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그의 창작 행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구나, 중심과 원칙으로서의 남성에 비해 여성은 변방과 변칙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창조력은 성차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성에 대한 자각으로 충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니토 올리바식의 반페미니즘 논리는 우수한 작품을 산출하는 작가면 그가 여성이건 남성이건간에 모두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민주정신과 평등의식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우수하다는 평가가 남성적 기준에 의한 것일 때에 그러한 논지는 여성을 남성의 기준으로 환원시키는 가부장적 쇼비니즘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다.
실상 성을 초월해서 무성(無性)이 될 수도 없고, 공평하게 중성이 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성적 무차별은 불가능하다.  또한 성의 평등이란 단지 여성의 인간화, 즉 남성화 과정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공정무사한 성의 민주화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므로 성차별을 외면하고 성별을 무시하는 미술 비평이란 결국 부계사회의 질서를 떠받드는 또 하나의 남성적 담론을 창조하는 일로 귀결되는 것이다.양주혜가 양성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함은 그가 여성성을  중시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성성이 결여된 무성이거나, 혹은 남성성을 지향하는 중성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양주혜 예술의 기조를 이루는 양면성의 미학은 이러한 양성적 특성에 기이하는지도 모른다.  양주혜는 일견 모더니스트 경향의 추상 작업을 하는, 즉 남성적 언어로 작업을 하는 성아 없는 여성화가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의 작업을 하는 많은 여성 작가들이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양주혜는 남성적 껍질 속에 언제나 여성성의 노른자를 보유한, 언젠가는 껍질을 깨고 나올지도 모르는, 양성적 감수성의 작가이다.  온전한 원점도 아니고 직선도 아닌, 비기하학적인 그의 점과 선이 시사하듯이, 그는 점찍기와 선긋기에서부터 여성과 남성의 마찰, 또는 그것들의 화해로서의 양성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격자속에 점찍기를 반복하는 미니멀적 질서와 논리가 남성적 교육과 미술사의 무게를 반영하는 언어를 통하여 존재하는 화가 양주혜의 일면이라면, 그러한 엄격한 회화적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일련의 노력들 즉, 격자와 직선으로부터의 이탈, 화면으로부터의 돌출 등은 여성적 본성을 표출하는 실존적 양주혜의 다른 일면인 것이다.양주혜의 여성적 본질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은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보다는 그의 수공예적 작업 방법이다.  그는 잘라내고 오려붙이고 풀칠하고 바느질한다.
그리고 바른 위에 또 바르고, 칠한 위에 또 칠한다.  꼬질꼬질 손때를 묻히며 한바늘 한바늘 수놓듯이 그는 점과 선과 색의 수예품을 만든다.  캔버스 대신 격자로 퀼트한 커튼 감, 또는 사방 줄무늬의 옷감에 그려진 평면작업이나, 달걀핀을 모아 붙인 요철의 표면에 작업한 종이 부조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그의 실험정신과 함께 강한 여성적 본성을 반영한다.  특히 부서진 의자, 고물 사다리, 민속품, 농기구를 채색하여 작품화는 최근의 「파운드 오브제」(found object)연작은 지금 양주혜가 기계적 구조물에서 수공품 오브제로, 규칙에서 불규칙으로, 직선에서 곡선으로, 다시 말해 남성적 표현에서 여성적 표현으로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여성적 세계로 진입하려는 과도기에 직면해 있음을 암시한다.  남성적 체계의 명료함으로부터 벗어나 탈체계의 여성적 애매 모호함으로 진행하는 과정 중의 작업이기 때문에 이 오브제 연작들은 미학적 완성도에서는 미진함을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변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변화는 양주혜의 예술적 성장과 병행하는 성에 대한 인식이 의식적으로든 또는 무의식적으로든 창작 과정에 작용함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성에 대한 자각은 그의 예술의 변화와 발전을 촉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신방직 사옥 가림막

양주혜 설치 작업전

일신방직사옥 신축공사현장 가림막틀

이번 서울 여의도 소재 일신방직 사옥 신축공사현장 설치작업은 일반적으로 공사기간 중 건축물의 표면을 가리는 <가림막틀>이 장기간동안 도시공간속에 설치되어 시민들의 시선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가림막 자체를 작품화하자는 의도로 제작된 것이다. 이리하여 예술행위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무시할 수 없는 일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규모는 70m X14m, 높이 50m, 지상 11층으로서, 이 공사장의 4면을 싸는 가림막은 1.5m X 1.5m 정방형의 백색 비닐 천에 각기 빨강, 파랑, 진노랑, 밤색, 하늘색, 초록, 연노랑, 보라, 흑색, 연두, 주황 등 11가지색의 그림을 차례로 실크 인쇄한 것으로 모두 2,500장이 사용되었다. 그중 돌출부위의 빨강, 연두, 주황, 연노랑은 형광 안료로 처리하여 야간에도 보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가림막은 1990년 3월 9일에 시작하여 매층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올라갈 때마다 그에 맞추어 설치 되었으며 가림막틀이 11층에서부터 아래로 해체되기 시작하는 7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계속적으로 설치되어 있을 예정이다. 따라서 건축공사의 진행상황과 맞물린 이 도시공간의 전시회는 한시적이지만 약 6개월간 계속되는 셈이다.

끝으로 오래 전부터 구상해온 이 작업이 구체적 결실을 맺도록 재정적 후원을 제공해주신 일신방직 김영호 사장, 그리고 실무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제작을 맡은 성진기획 제작진, 설치를 담당한 한국건업층 현장 담당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양주혜

For the current construction of the new building of Ilshin Spinning Co. in Youido, we have transformed the “installation” into an artistic work. This was done because of its unsightly view to the public. We all know that art is indispensable part of our daily lives.

This 11-story building’s dimensions are 70m x 14m x 50m. 2,500 of 1.5 x 1.5 white vinyl sheet has been used to form the installation which surrounds all four sections of the building. Each sheet has been silk printed with one of the eleven colors listed here: red, blue, deep yellow, brown, baby blue, green, light yellow, purple, black, lime, or orange. The protruding section is painted in fluorescent red, lime, orange, or light yellow in order to allow visibility at night.

This installation was first set up on March 9th, 1990, and each sheet was added with rising of each story of the constructing building. The installation will be taken down from the 11th floor and downwards, starting at about mid-July to late August. Therefore, this open-air display will be shown for about six months until it is taken down.

I’d like to extend my gratitude to president Kim, Youngho of Ilshin Spinning Co. and executives for providing financial supports realizing, that this long-planned project would have not been possible without them. I’d also like to express my deep appreciation to the production team of Sungjin Planning Co. and construction sight attendants of Hankuk Sonstruction Co., who were responsible for the installation of this blind fence.

Yang Juhae.

작품평론_오광수01

드로잉이 단순히 어떤 대상을 기술한다는 것만 이 아니라 그려지는 것을 부단히 확인해 간다는, 행위자체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현대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그림이 끝났을 때 거기 무엇이 그려졌는가를 확인했지만, 결과로서 보사는 진행자체에 구조적 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오늘날 드로잉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잇다. 70년대 후반부터 갑작스럽게 왕성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 드로잉의 추세를 단순히 <손의 회복>이라는 서술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이처럼 그려지는 진행을 <확인>한다는 구조적 의미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양주혜씨의 그림도 드로잉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으로 분류해 볼 수 있으며, 현대회화의 전체적 문맥에서 조망한다면 회화의 반성적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화면에는 점과 작은 필획(筆劃)들로 채워지는데, 이 퍽 단순하게 보이는 드로잉적인 요소들이 실은 그리는 것과 지우는 것이란 상호 모순 속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내고 있다. 점이란 것이 그려지는 것의 최소한 현상이라고 보았을 때 화면에 무수하게 찍혀져 나가는 점의 반복은 실은 그리는 것을 극소화 시키면서 동시에 그려지는 것의 극대화를 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잇다. 지우기로 등장하는 필획-터치-도 같은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 무언가를 계속 지워나가는데 화면에 남아나는 것은 계속 그려나간 현상이다. 최소로 그리고 또 그린 것을 지워나가는 진행이 결과적으로 그리는 것(드로잉)의 극대화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 밀도 높은 전면성(all-over)은 점획과 터치의 순간이 갖는 운동과 전체로 전개되어가는 진행에서 수반되는 긴장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보인다. 하나하나의 점과 터치 등은 무의식적이면서 생생한 자적(自適)으로 반향(反響)된다. 그저 무심코 점획은 시작되지만 시작되자마자 높은 자율성에 의해 갑자기 높은 긴장을 수반하게 된다.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수동적인 견인(牽引)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유로움과 가둠의 일정한 질서의 그물망이 형성된다.

그의 화면엔 이미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눈부신 반점(斑點)과 싱싱한 자적이 상상을 대신한다. 색채의 감동적인 힘과, 그 힘의 투명한 표상으로서의 운동은 화면을 팽팽한 시위로 당겨주고 잇다. 이 같은 화면의 생동감은 점과 터치라는 드로잉적인 성격만이 아니라 색채의 쓰기 (색채 가리그라피)라고나 불리울 독특한 구조에서 확인되어진다. 결정된 물질, 수동적인 매체로서의 색채가 아니라 존재하는 현상,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색채로 구조화 된다.  여기 색채쓰기는 빛으로의 탈바꿈의 한 방법으로 등장되어진다. 색채가 빛으로서의 투명한 존재의 깊이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을 근대 이후 몇몇 뛰어난 화가들에 의한 것이지만, 이 작가의 경우에서도 색채와 빛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화면 전체의 기조에 깔려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화면을 단순한 평면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투과적인 장치로서 보려고 한 방법에서도 이점을 엿보게 한다. 바로 이러한 장치는 패턴∙페인팅이나 전면회화가 갖는 단순한 반복구조가 보여주는 평면으로서의 회화의 인식이란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벗어나, 화면이라는 단순한 공간을 공간과 시간이라는 차원 속으로 회화를 내몰려는 신선한 방법으로 인식된다.

여기에 색채는 부단히 빛으로서의 치환의 논리가 획득되어진다. 이제 점들과 터치들은 그들의 공간을 평면에서 벗어나 무한한 시공간 속으로 확대하면서 화가의 손의 영역을 떠나서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 그리는 것의 비판적 구조로서 출발한 그의 화면은 단순한 드로잉의 개념을 떠나 색채와 빛, 공간과 시간 등 복합적인 존재의 문제로 서서히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吳   光   洙

(미술평론가)

작품평론_오광수02

양주혜씨의 작품가운데는 전시장 공간에서 벗어난, 도시 구조 속의 작품들이 적지 않다. 우선 도시 구조란 말은 거대한 스케일을 연상하게 한다. 건물의 한 면을 완전히 천으로 가린 경우나, 또는 건축 중의 가림막틀 그 자체를 캔버스로 대용한 경우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한결같이 영구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극히 일시적인 설치로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가령 최근작으로 여의도 일신방직 신사옥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신축 건물의 가림막틀 그 자체가 이 작가 특유의 점획의 작품들로 대치되었다가 건물이 완공되면서 여늬의 가림막틀처럼 거두어져 버린 것이다. 이 작품은 건물이 완공되기까지라는 시한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다른 건물을 에워싼 작품들도 대체로 짧은 한 시기에 끝나버리고 있다. 이는 마치 크리스토(Christo)가, 자신의 작품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전과정일 뿐 완성된 후의 것은 단순한 유물적 가치밖에 없다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어떤 일정한 기간의 한시성 속에 작품의 삶을 부여하려는 태도에서 이들은 서로 유사성을 보인다. 그렇긴 하지만, 완성으로 향한 진행 자체를 작품이라고 하는 크리스토의 태도에 대해, 양주혜씨의 경우는 일정한 현장의 삶이 작품의 참다운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독자한 방법론을 보이고 있다.

유물로서의 작품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입장에서는 크리스토와 양주혜씨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나, 크리스토가 행위의 개념성에 자신의 방법론을 걸고 있는 데 비해, 양주혜씨의 경우는 오히려 완성된 회화자체가, 비록 짧은 한 시기이기는 하나, 생생한 삶을 누린다는 점에서 훨씬 열려진 회화적 개념을 보여주고 있는 편이다. 여기서 열려진 회화적 개념이란 작업 자체가 개념적인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발상에서 진행과 결과를 잇는 사고와 행위의 일정한 연속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선 그의 작품이 갖는 회화적 현상을 살펴보면, 그린다는 드로잉적 의식이 시작과 마무리를 연결하는 강한 띠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리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그리는 것을 끝내며, 또 그 행위가 반복되면서 시작과 끝이 애매해져 버리는 연속성 가운데 마침내 회화의 전체적 존재가 드러나버리는 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는 행위와 그림은 등가(等價)한 것이 되고 유물적 가치로서의 작품은 부단히 탈각하게 된다. 그림이라야 벽에 걸 수 잇지 행위를 벽에 걸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함으로써 액션 페인터들의 이른바 행위의 우위성을 꼬집은 슈잔 손타그(S. Sontag)의 흥미로운 언급은, 양주혜씨의 작품의 경우에서는 행위와 그림이 등가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행위도 벽에 걸 수 있다는 논리의 반문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행위는 오토마티즘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일정한 구조성을 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증식의 논리와 회화적 요소가 서로를 강하게 견인하면서 보여주는 상호작용, 기본적 단위로서의 점의 반복과 선의 칸막이, 또 이것들을 지우려는 행위의 연속이 일정한 통어와 자생의 상황 속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동하는 상황의 구조를 획득해가고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적 가치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상황으로서 그의 작품이 갖는 매력은 최근작들에 와서 더욱 증폭되는 인상을 주고 잇다. 천의 개념에서 확대된 이불보, 테이블보, 베개, 방석, 커튼 등에서 뿐 아니라 딱딱한 기물들, 예컨대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생활 기물들에까지 상황의 구조가 확대 적용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같은 논리의 진척은, 생활의 일부가 회화가 되고 회화가 생활의 일부가 된다는 소박한 논리성을 벗어나서 생활 자체를 회화로서 숨쉬게 하고 회화자체를 생활로서 숨쉬고 하는 보다 적극적인 상황으로의 유도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잇다.

회화가 생활이 되고 생활이 회화가 될 경우, 회화는 은유적 체계로서 우리들의 삶을 대신한다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점 하나하나는 한 순간에 태어나고 또 한 순간에 끝나는 일시적인 삶에 한정되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 끝없는 증식으로 인하여 우리들이 꿈꾸는 영원성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삶의 원초성으로의 환원과 삶의 영원성으로의 확신이 엮어내는 당위와 무순이 그의 작품을 또 다른 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매력이다.

吳   光   洙

A considerable number of the works by Juhae Yang constitute projects that are part of an urban structure framing beyond the boundary of the exhibition space. The phrase “urban structure” immediately connotes huge-scale productions.

In her works, she uses the complete coverage of the façade of a building or the scaffold coverings at a construction site as her canvases. These works are not a permanent nature, but rather are the happening of a temporary installation. For example, in one of her recent works, the conventional scaffold coverings at the construction site of II-Shin Spinning Company in Yoido were replaced with her distinctive pattern of colored spots and strokes on vinyl sheets, and later removed once the building was completed. Therefore the installation work has a limited life-span. Other works of hers, such as wrapping of buildings, are also ephemeral.

This temporariness reminds us of Christo whose work exclusively deals with the process toward completion; once completed, the work exists as tangible traces. Both Christo and Yang share similarity in terms of their efforts on bestowing life to their works within a limited frame of time. However, contrary to Christo, who defines his works solely as the progress toward completion., Juhae Yang demonstrates an independent methodology where the life of the exhibition site manifests the true value of her works. Although they both adhere to the philosophy that the finished product merely has value of remains as traces, Juhae Yang is able to deliver a more open concept of painting since the completed pieces enjoy a full vivid life in spite of the short time span, whereas Christo’s whole method relies on conceptualization of action. A more open concept of painting means that she does not confine her production within the conceptual frame, but yet clearly visualizes the continuing thoughts and action joining each of the stages of initiation, interim progress and output.

In her painting , the “drawing” functions as a strong binder between the initiation and completion. Hence, the work of beginning and ending of drawing occurs simultaneously, and the resulting repetition of this process eventually creates the phenomenon revealing the whole existence of the work that consists of an equivocal beginning and end. In this process the action of drawing and the resultant painting become equivalent, so that the work of art is liberated from the notion that it has only a material value. Susan Sontag interestingly points out that finished paintings are hung on the wall, not the action itself of creating the painting, suggesting ironically superior attitude of the action painters. In Juhae Yang’s work, however, the argument becomes irrelevant since her action can surely be hung on the wall from the point of view that her action equates to the finished painting.

The aforementioned action in this case represents more of a certain ordered structure rather than a phenomenon of automatism. The logic of multiplication, the repetition of the spot as a basic unit, the grid line, and the continuation of action to erase all of the above, are displayed in a controlling and self-reproducing circumstance. They are, so to speak, the processes of labor that accomplish the vigorous circumstantial structure.

The essence of her work, as a live breathing circumstance and not as a material value, has recently broadened further. She is expanding the circumstantial structures to include items in daily life. These include her works with a bed spread, table cloth, pillowcase, cushion, and curtain which are extended concept from fabrics, in addition to the rigid common place objects made of wood and plastics. Such an advancement in logic is more than just a simple argument that a part of daily life becomes painting and vice versa. Rather it reflects her persuasion to a more positive situation where her life breathes the painting breathes daily life.

Lastly, there is yet another significance to this metaphor which portrays our lives: life is process of work and the work is process of life. Each individual dot in her work is born and ended in an instant, and yet the endless multiplication symbolizes the aspired eternity. The natural consequence and contradiction woven from the primordial nature of the infinitesimal and the eternity of infinite multiplication depicted in her works are fascinating factors which appeal to us to appreciate her work from a new angle.

Oh Kwang-soo

점으로 그리는 시간에 대하여

점으로 그리는 시간에 대하여

이 은 주 (금산 갤러리 큐레이터)

1.

양주혜의 작업은 무언가를 그린다기 보다는 색점을 찍어나가는 매우 단순한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왜 색점을 찍느냐는 질문에 작가는 그것이 시간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 중 하나라고 대답한다. 작가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그 작업은 재료 위에 “시간을 묻혀놓고 그 위에 또 다른 시간을 포개어 묻히는” 행위이다. 천의 무늬와 홈을 따라서 찍힌 점들의 연속은 작가가 색점들을 찍었던 매순간의 흔적들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의 지점에 반복적으로 머물러 있는 각기 다른 시간 마디들의 축적이기도 하다. 하나의 점은 비연속적이고 단절적이지만 전체가 모여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공간화된 시간이 추이를 보여준다. 양주혜는 형상화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의 존재 자체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는 점이라는 조형의 최소 단위를 사용하여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근작에서는 점들이 더욱 작아지고 천의 밀도와 거의 일치됨으로써 마치 맹인용 점자나 모스 부호와도 같은 특성이 발견된다. 천에 패인 홈을 따리 찍혀진 점들은 솔기의 흐름을 따라 흘러감으로써 의도적인 느낌이 최대한 배제되고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더욱 순응하고 있는 듯 하다.

2.

양주혜는 무한한 시간이 공간 위를 스치고 간 흔적을 색점이라는 지극히 본질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그의 색점은 우리의 한시적인 삶이 영원한 존재와 조우하는 순간에 선물받는 짧고도 강렬한 은총의 순간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단순히 무리적인 색가(色價)가 아니라 빛의 현존이다. 양주혜는 타월, 침대보, 조각이불, 치마 등 생활의 속내가 짙게 배어있는 일상적인 기물들 위에 색점을 찍음으로써 현실의 흔적을 지우고 빛을 입힌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을 통해서 시간의 영속성과 만난다. 그것은 “빛이 있으라”고 했던 태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존재해 왔고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의 표현대로 그의 작업은 결국 “쓰레기 더미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릴 운명이었던 물건들을 우리들의 삶 속으로 다시 가지고 와서 색칠하고 점 찍고 잇고 맞추어 하마터면 그들이 잃어버릴 뻔했던 이승의 시간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주혜에게 있어서 일상의 시간에 지배 받는 모든 공간은 그가 색칠하고 점 찍어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야 할 열려진 캔버스일 수 밖에 없다. 결국 그가 색점을 찍어나가는 작업은 일상을 빛으로 물들여가는 아름답고도 경이로운 변화의 과정인 것이다.

3.

양주혜 작품의 색점들은 공감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나는 색채를 보는 동시에 듣는다. 색점들이 각기 지니고 있는 색가(色價)는 곧 음가(音價)로 감지되고 색채의 하모니는 곧 음의 하모니가 된다. 색점 위에서 흔들리는 빛의 움직임은 마치 염불이나 기도 소리처럼 높고 낮은 중얼거림들이 서로 반향하는 나즉한 화음이 되어 울려 퍼진다. 흰 태양빛이 여러 스펙트럼의 혼합인 것처럼 양주혜의 작품 속에서 연속적 색점은 하나의 빛으로 환원되어 모든 감각적 체험과 한데 얽힌다. 그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영구히 순환하는 원형적 시간이 가시화되는 공간이며, 깨달음 속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합일되는 공간이다.

양주혜의 모든 작품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공간을 현실의 공간 속으로 확장시켜 나가려는 모색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색점 하나 하나에 고유한 음가를 붙여서 그림을 하나의 악장으로 연주하는 빛의 오케스트라를 꿈꾸고 있다. 몇 년 전 호암미술관의 『한국미술의 빛과 색채』전에서 이미 초안이 드러난 그의 이 아름다운 꿈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시화되길 소망해본다.

하나, 둘, 셋… 시간세기

JUHAE YANG ∙ Time-Wanderings

양주혜 하나, 둘, 셋 시간세기

설치 작품을 구성하는 나무 조각을 이용해 색을 찍어낸 판화, 글이나 책을 다량으로 복제하기 위해 최초로 고안되었던 목판인쇄술에서 판화미술의 뿌리를 찾는 개념을 구현한 작품, 판화미술제 기간 중 전시장에서 관객이 직접 설치 작품의 나무조각을 사용해 원하는 색을 찍으며 판화제작 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

차갑고 단단한 동판 위에다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온갖 기법을 동원해 가며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참 오랜 세월 잘도 보냈다. 작업에 빠져 있노라면 이 길고도 번거로운 판화 작업을 계속하게 만드는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도대체 판화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옛날에 팔만대장경을 파던 선조의 손놀림은 어땠을까 상상해봤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주조했던 조상을 내심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바로 이 조상님들이 판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그림을 태어나게 하는 씨를 처음 심어놓았던 것인데… 목판 활자로 한 글자 한 글자 먹을 뭍여 글을 찍어 나가던 옛 조상들에게 목판화로 찍어내는 내 색점들을 올리고 싶다.

空∙0∙不

0

있음과 없음의 환원과 확산

수년 전부터 양주혜는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 기록한 불경의 형태에 깊은 관심을 보여 자신이 진행하는 작업의 바탕고간으로 활용해 왔다. 5자성귀를 기본으로 커다란 원형을 이루는 「반야심경」의 도상성을 자신의 조형공간으로 끌어들인 일련의 작업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그의 관심은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형태적으로 해석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의 윤회적 미로 공간으로 발전한다.

이 법계도는 화엄경의 내용을 가로 15자, 세로 14자의 큰 사각형으로 배치하고 그 전체를 다시 4개의 소구역으로 나누되, 불경을 읽는 사람의 시선이 큰 사각형 중앙의 ‘法’자에서 그 왼쪽으로 기하학적 사각형 소용돌이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여 바로 밑의 ‘佛’자에 이르기까지 도형 전체를 일주한 다음, 그 바로 위에 놓인 최초의 ‘法’자로 돌아가 다시 시작, 그 순환을 반복하도록 절묘하게 배치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작가는 원래 평면으로 구상된 이 문자미로를 입체구조로 재해석하여 대형의 조형물로 가시화하는 작업을 구상한 바 있다. 즉 법계도의 기본도형을 본 따 입체적으로 제작한 투명한 벽의 미로를 따라 사람들이 독서하듯이 걸어가면서 그들이 자신의 발 밑에 이어지는 문자기호의 내용과는 별도로 투명공간의 외길미로 속에서 갇힘과 열림, 무한과 유한에 대한 감각과 사색의 끝나지 않는 순환을 체험하도록 시도해 본 작품이 그것이다.

양주혜는 오래 동안 원고지나 바둑판, 타일 벽과 같은 일상적인 오브제들의 정형적 구역성을 표현의 기본 형태로 사용해 왔다. 그는 실제 오브제가 갖는 구체적 실용적 의미를 배제하고 그 원초적 형태로 환원된 사각형 위에 빛과 색의 새로운 조형성을 창조함으로써 형태와 내용, 전체와 부분 사이의 관계와 그 반복, 순환에서 일깨워지는 시간의 감각과 의미를 떠올리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주사위나 쥐덫과 같은, 주로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é)를 사용하여 그 형태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또 다른 정형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거나, 또는 타일로 사각형의 구조물을 지은 (안동 조각공원 설치작) 작업들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의미내용을 정형화시킨 예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법계도는 이런 시도들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동시에 작가가 추구하는 조형적 모험의 한 궁극적인 귀결이라고까지 여겨진다.

사각형과 미로라는 주어진 형태를 입체적인 공간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1999년 예술의 전단에서 열린 <팥쥐들의 행진>전에 출품한 설치 작품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책들이 가득 꽂힌 책꽂이가 만들어 내는 미로를 따라 관람객을 통과시킴으로써 일견 서점 속에 들어온 손님의 느낌을 가졌던 관람객이 점차 책의 형태와 제목들이 형성하는 미로 속에 접어들어 그 공간 속에서 자기와 대면한 시간의 고립감을 느끼도록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법계도에서 출발한 이런 개념을 보다 더 단순화하여 또 다른 표현 매체인 선(線)과 소리로 해석한 설치작업을 선보인다. 전시장의 바닥과 벽면에 선으로 법계도의 미로를 설치하여 조성된 명상의 공간은 관람객을 미로의 수수께끼로 인도한다. 그 안에서는 불경의 독경소리와 음악소리 그리고 무의미한 숫자를 읽는 건조한 목소리가 뒤섞여 들린다. 혼돈의 소리일가, 미로 속에서 위태롭게 옮기는 발걸음을 이끌어주는 지시음일까. 일상적인 습관과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놓인 인간의 본능에 따라 의미 있는 소리를 분간해 보려고 애쓰며 귀를 기울이고, 헛걸음을 내딛을새라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옮겨 놓다 보면 어느덧 2초에 한번씩 들리는 숫자의 박자에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맞추게 된다. 7자성귀의 불경소리와 계속 반복되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7자리 숫자. 그 배경에는 플루트와 소프라노가 겹쳐진 단음조의 음악이 깔린다. 우리는 문득 의미를 알 수 없는 상징체계가 한없이 중첩되는 공간 에서 갈피를 잡아 보려고 애쓰는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그 순간, 우리가 서있는 자리는 그 곳이 어디이건 발디딤이 불안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미로 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갖게 되지 않을까.

사실 양주혜에게 있어 색과 빛으로 표현되는 가시의 세계를 소리라고 하는 비가시의 세계로 번역해보고자 하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원고지에 글을 써나가듯이, 혹은 쓰여진 글을 지워나가듯이 시작된 그녀의 초기의 <글쓰기-그리기-지우기>작업에서 마치 어떤 내용과 감정을 암시하는 듯 크고 작은 색면이 연속적으로 반복 중첩되는 작품이나, 그 이후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리 찍어지는 색점들이 점차로 선(線)을 이루는 표현으로 변모해 간 후에도 항상 그녀의 표현 세계는 명상으로 인도하는 음악과도 같았다. 폴 클레(Klee)의 경우와 같이 내면의 진동을 전달 표현하는 감성적 음악성과는 달리 그녀의 화폭은 제한된 수의 색채들을 사용하면서 그 색채 하나 하나마다 일정한 음가를 지정한 듯 그들 색-음이 어우러져 어떤 패턴과 리듬을 만들어 내면서 음악적 표현으로 연장된다. 마치 교향곡의 악보가 악기마다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전체의 조화로움을 만들어 내듯이, 겹쳐서 혹은 빗겨서 찍어나가는 그녀의 색점들이 만들어 낸 화폭은 작곡가의 악보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94년 호암갤러리 <한국의 빛과 색>전에서 선보인 설치작품 <듣는 색채-보는 소리>에서는 하나의 색을 하나의 음으로, 점 하나를 한 박자로 변환하여 플루트와 소프라노가 그녀의 화폭을 악보로 하여 연주한 시도가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같은 ‘악보’의 한 변주인양, 1) 플루트+소프라노의 음악, 2) 박자를 두 배로 늘린 독경, 3) 2초마다 한번씩 숫자를 읽는 남녀목소리의 합성 등 세 가지 시퀀스로 분리된 소리들을 다시 컴퓨터로 합성하여 또 다른 의미의 상징체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空∙0∙不(공∙영∙불)」이라는 기이한 제목을 붙이고 있다. 공간의 있고-없음, 존재의 있고-없음, 의미의 있고-없음과 같이 대립적인 관계이면서도 있음이 없음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어느 것도 하나만의 상태로서는 무의미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완전히 그 자체만으로 환원된 상태에서 개체의 있고-없음의 무의미는 비로소 개체가 반복되어 상호간의 정형적인 관계를 갖게 됨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의 상징계로 확산된다. 디지털의 1과 0이 이루는 관계와도 같이, 이러한 있고-없음은 곧 양주혜의 화폭에 찍힌 한 점 한 점의 색점에 포개어지고 있다 하겠다. 1과 0이라는 환원된 개체의 있음과 없음이 무한히 반복됨으로써 확대, 확산되는 의미의 세계. 이는 바로 의상대사의 법계도의 공간과도 상징적으로 상통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대형 입체 조형물이 마침내 현실화되어, 그 투명미로의 우주적 형태 속에서 갇힘과 열림, 고립과 무한으로 반복되는 내면 세계가 조형적으로 투영되고 체험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김 정 화 (미술사가)

죽은 공간에 ‘숨’을 불어넣으며

일하며 생각하며                                                 

죽은 공간에

숨’을 불어넣으며

양 주 혜/설치미술가. 프랑스 뤼미니 미술대학 졸업.

파리제8대학 조형예술과 박사과정 수료.

’86년 동아미술제 입상, ‘90년 석남 미술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나를 화가로보다는 설치미술가라 부른다. 회화나 조형물과는 달리 내 작품은 언제든지 변형 가능하고 이동할 수 있어 그렇게들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편의상의 이름에 지나지 않을 뿐 원래 있는 미술상의 장르는 아니다.

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우정의 문화열차 설치작업, 일신방직 사옥 신축공사현장 가림막틀 설치작업, 표화랑 설치작업, 비무장지대 설치작업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렇듯 나의 작업은 전시장공간에서 벗어난 야외, 혹은 도시구조 속에서 이뤄질 때가 대부분이다. 일신 방직사옥의 경우 건축중의 가림막틀 자체를 캔버스 대용으로 활용했다. 캔버스 즉 대형 천 위에 색점찍기식 그림 등을 프린트 하여 설치한 것이다. 프랑스 문화원 정면 설치 작업 때는 건물의 한 면을 완전히 천으로 가렸고, 우정의 문화열차 작업은 7량이나 되는 열차바깥에 비닐시트를 부착, 실크프린트 2천5백장으로 열차를 장식했다.

나의 작품이 건축중의 가림막틀일 경우 그것은 건물이 완공되면서 거두어진다. ‘건물이 완공되기까지’라는 한시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짧은 한 시기로 내 작품의 생명이 끝난다고 해서 나는 서운해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 현장(공간)에서 내 작품이 생생한 삶을 누린다는 점에서 나는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

그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나는 때로 내 작업에 회의를 느낀다. 내 작품들은 대개 스케일이 크기 때문에 보조를 받거나 스폰서를 구해야 가능한 것이 적지 않다. 작업을 하자면 어차피 감수해야 할 문제지만 때론 한없이 구차하고 번거로운 생각이 든다. 주문을 받아 작품에 임할 때도 크고 작은 마찰은 으레 생기기 마련이다. 요구하는 것들이 많다.

눈 질끈 감고 응해주면 간단할 것을, 예술을 결코 돈과 맞바꾸지 않겠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상황을 어렵게 만든다

그나마 스스로가 대견하다 싶을 땐 건축현장에서 용접 같은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결코 그들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보다 못하다는 자만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용접일보다 나을 것은 없지만 좋아하지 않았다면 ‘설치미술’을 선택했을 리도 계속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죽어 있던 공간이 혹은 그저 무덤덤한 공간이 내 설치작업으로 생명력을 갖고 꿈틀거릴 때 나는 보람을 느낀다.

테이블보며 커튼,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생활기물들도 내 작품들의 훌륭한 소재가 된다. 버려진 폐품들도 아크릴릭 기법 등으로 작업을 해서 적절한 공간에 설치하면 그대로 좋은 작품이 된다. 생활자체를 예술로서 숨쉬게 하고 예술자체를 생활로서 숨쉬게 하는 것… 설치미술의 의미를 나는 그런 것에서 찾는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다른 미술장르보다 설치미술에 유난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때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회화들이 너무너무 좋게 여겨질 때도 있으니까. 난 조각이든 회화든 설치미술이든, 입체든 평면이든 그런 방법적인 것들이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표현해 내려가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네가 궁극적으로 설치미술을 통해 표현하려는 것은 무엇이냐” 고 사람들은 묻는다. 일관되거나 정해진 답이란 있을 수 없다. 난 그저 그때그때 내게 주어진, 혹은 내가 선택한 공간(현장)해석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나 나름대로 해석해서 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닌 그런 소박한 것뿐이다.

그러나 예술에 ‘완성’이란 없는 것일까. 난 늘 내 작품이 모자란 것만 같다. 언제나 ‘미완’인 것만 같다. 열심히 하면 뭔가 되리라던 믿음. 그 믿음은 믿음에 머물 뿐이지 현재완료형이 되어 나를 충만하게 만든 적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난 때때로 절망도 한다. 중노동과 다름없는 작업 후 파김치가 되어 돌아올 때보다 정신적인 절망감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들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힘들어하고 곧잘 회의에 빠지면 나는 일을 떠난다는 생각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감히 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산다는 일’이고 설치작업은 내 삶의 일부분으로 용해돼버린 지 오래인 까닭이다.

양주혜展 / 갤러리인

양주혜

9.15~29 갤러리인

이번 전시에서 양주혜는 두 가지 개념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관객의 행위와 작가의 空∙0∙不 개념을 통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空∙0∙不의 개념을 색과 음으로 상징하는 이중구조다. 작가는 예술에 있어 내용과 형식을 통합하는 것과 수적인 질서와 불경의 의미에 관심을 가져왔다. 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 不生不滅不垢不淨…. 반야심경을 통해 그 내용을 윤회의 원형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내려 했던 작업으로부터 이제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독창적인 읽기 방식으로 고안했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의 의미를 법(法)자로부터 불(佛)자로 이어지는 윤회적 움직임의 형식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으로 실증할 수 없는 空∙0∙不의 개념이 시각적인 형식의 결과물로만 남는 다면 개념미술의 오류를 또 한 번 범하는 셈이 될 것임을 작가와 우리 모두 잘 알고 잇다.

따라서 관객의 행로로써 작품 속에 진입하는 행위와 空∙0∙不의 개념에 대한 이해,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와 색이 상징하는 바가 총체를 이룰 때 작품의 의도는 실현된다. 관객은 독경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화엄경의 글자들은 하나씩 마음 속에 새기면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구성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수적 질서에 대한 정확한 작가의 분석과 화엄일승법계도의 의미, 그리고 소리와 색채를 결합시킨 이지적인 작업의 결과이다.

수적 질서와 듣기.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플루트 소리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7자리 숫자를 읽는 소리로 구성된 15분짜리 음을 세 부분으로 나눈 뒤 한꺼번에 겹쳐서 5분 분량으로 녹음하고 2분 30초의 독경을 2배로 늘려 5분으로 합성하여 만든 구성을 작품과 함께 체험하면서 듣게 만들었다. 7자로 기본을 구성하는 화엄경은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에서 210자를 이루어 관객의 걸음으로 210걸음에 해당하지만 한걸음이 45cm에 해당한다면 한 변이 90cm인 사각형이 이어져 형성하는 길을 모두 걷는 데는 약 5분이 걸린다. 따라서 관객이 걷는 시간과 듣는 시간은 5분 동안이며 그 동안 화엄일승법계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행위와 보기. 관객은 작가가 의도한 대로 걷는 행위를 하며 불경의 의미를 한 글자씩 보면서 머리 속으로 그 의미를 새긴다. 또한 그것은 윤회를 상징하는 끝없는 길을 따라 오방색의 천 위에서 눈을 옮기며 색점들을 보는 행위이기도 하며 작가의 색점들은 소리-음에 대한 상징이다. 그것은 “궁극적인 내 소원은 내 그림을 가지고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것이다.”라고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각각의 색깔에 음을 정해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난해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작업이지만 숫자와 독경을 들으며 걷고, 끝없는 선과 색점들을 따라 눈을 옮길 때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空∙0∙不 개념 속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미경 ∙ 미술사학

시간의 또 다른 중층성과 그 불가사의

시간의 다른 중층성과 불가사의

윤우학(미술평론가)

지난 해 10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양주혜의 개인전(이달의 작가전)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의 전시로 인해 우리에게 꽤나 인상깊은 무엇을 던져 주었던 전시회가 아니었나한다.마치 로봇과 같은 형태의 기계가 그 본래의 기능과 메카니즘을 잃고 목적 없이 돌면서 그 몸체 내부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종이조각들을 담고 하염없이 돌아가는 장면을 뜻밖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작가와 직접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것이 직물공장의 직기로서 하나의 오브제로 전시된 작품인 것을 알게 되었다)그것은 사실 기계로서의 일정하고 획일적인 작동보다는 어딘가 새롭게 생명의 열기와 호흡을 얻은 듯한 유기체로서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었고 작가 역시 그러한 점에 의도를 둔 듯 외부 물체에도 투명 복합재료로 싸서 색깔을 칠하고 뿌려 놓았었다.사실 필자는 이 작업으로 인해 양주혜라는 작가를 보다 또렷하게 기억하게 되었고 또 궁금한 점을 갖게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그가 여성작가라는 점에 있어서도 퍽이나 이색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기도 했다.물론 필자가 여기에서 벌써 남녀와 성을 차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에 스스로의 안쓰러움을 느끼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화단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남녀작가의 여러 가지 상황이나 조건과 여건을 염두에 둘 때, 그의 작업은 오히려 그러한 구별을 무의미한 것으로 넘기는 어떤 초월성을 거기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실상 작가 양주혜는 대학시절부터 남다른, 아니 어쩌면 어려서부터 좀 특별한 경험과 체험을 가졌던 작가였고 그것이 그의 작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결과 좀 엉뚱하고 뜻밖의작업이 극에게서부터 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등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예컨대 국민학교 다닐 때 건강으로 인해 휴학을 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느꼈던 충격, 고등학교시절에 또다시 건강으로 휴학을 하고 섬세한 감수성의 시기를 남다른 경험아래 보내게 되었던 심리적인 갈등, 대학시절 학교에 대한 나름의 거부반응과 실망으로 타대학의 문학과 철학강의만을 열심히 경청했던 결과, 좀 뜻밖의 결혼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대학을 중퇴하고 프랑스로 떠났던 일들등이 바로 그것이며 이러한 경험들은 비록 외부적인 충격과 긴장은 별 것 아닌 듯 보일지는 몰라도 본인에게 던져진 내적 충격의 기억들은 그럴 수 없이 큰 것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평범한 여성의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어떻든 그의 그와 같은 체험과 경험은 그의 작업의 중요한 발상적 모티프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그의 작업에 꾸준히 나타나고 있는 「반복성」이 바로 그것이며 이것은 어렸을 때 학교를 휴학하는 과정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였던 공기돌 놀이의 반복성, 고등학교 휴학중 시간을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헤아려 갔던 벽지의 연속무늬, 외국유학 중 생경한 외국서적의 활자체로부터 오는 답답함을 잊기 위해 글자를 자꾸만 지워갔던 행위,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아 다른 강의보다는 판면수업에 매달린 채 그 반복적인 프로세스 속에 빠져들었던 일 등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그 자신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작가들의 언사치고 어쩌면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적절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을 가질 정도로 설득력있는 서술이었다.『나는 최초의 흰 공간을 더럽힌다.
말을 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으면 싶다. 이 모순된 욕망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흰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부정해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그림을 쓰고 있는 것이다.  쓴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 이 두가지가 동시에 나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나를 떠밀어내기도 한다.
나는 그 두가지 행위-그것은 과연 서로 다른 두가지 행위일까?-사이에서 그 어리둥절한 공지에서, 방황한다.어느날 나는 내눈에 익숙지 못한 외국어로 쓰여진 책을 펴들고서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백색표면에 도열하여 지나가는 활자들이었지만 실제로 내가 본 것은 그위로 떠가는 색채들의 소리였다.
내가 경험한 그 짧고 난데없는 순간의 환희는 오래 지속되었다.말을 잃은 상태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표현하거나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이라는 장치를 통하지 않고도 의미라는 단위들은 과연 생산될 수 있을까?  의문이 풀리지 않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하여 흰 공간을 색채들로 더럽힌다…』실상 양주혜의 작업은 다양한 재료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면서도 거기에 무슨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오히려 쓰고 베끼고 찢고 자르고 뿌리고 하는 복합적인 행위가 만들어 내는 거칠고 원초적인 흔적들만이 덩그렇게 남겨질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으로부터 우리는 또 다른 감성의 흐름을 발견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게끔 하는,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더 이상 불가사의 할 수 없고 또 숙명적으로 우리를 따라 다닐 수 밖에 없는 「시간」이라는 존재의 그 깊이를 드러내는, 아니 어쩌면 더욱 침잠시키고 농축시키는 그러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기실 필자가 그이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도 무엇보다 앞서 느낄 수 있었던 인상은, 작업의 거친 표면이었고 그 표면은 자연스레 내부를 충전시킨 채 그 내부의 의미를 열어주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존재했었던 것이다.한지, 투명지, 헝겊, 천, 나무, 거울, 유리, 비닐, 판화종이, 혹은 천장의 방음재 등등 얇은 평면성을 띄는 모든 것에 예의 그 시간작업으로서의 중복성을 계속 묻혀가고 더럽히면 이상스럽게도 거기에는 기묘한 정황이 창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낙서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아 오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의 「쌓임」이 거기에 서서히 드러나고 있을 따름이다.사실 그의 자유롭고 다양한 의식과 행위의 패턴은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한 곳에 결집되고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시간성」과 그 중층이라는 것이며 그는 하나 하나의 작업에 있어서조차도 그것 하나가 완성되고 완결된 무엇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보다 거대한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부분 내지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번도 조형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깊이」에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없다.  내 그림 속에서 선, 형태, 색채가 바라보는 사람의 머리 속에서 자아낼지도 모르는 「깊이」의 인상은 사실상 내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깊이라기 보다는 「그림을 쓰는」행위의 중복에 의하여 서로 다른 시간들의 동일한 표면위에 포개어질 때 생기는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의 중복은 조형적인 깊이 보다는 「시간의 깊이」에 가깝다.천 위에, 투명비닐 위에, 종이 위에 시간을 묻혀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시간을 포개어 묻히는 동안 재료 자체가 지니고 있는 속성들이 비로소 나에게 그린다는 행위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렇게 차곡차곡 겹쳐놓은 시간의 깊이들이 각각의 작품들이나 각 재료들 속에서 새로운 <언어>로 읽혀지기를 바라는 나는 벌써 또 다른 시간 속에 들어앉아 있다』작가 양주혜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그의 작업의 향방은 거기에 무슨 대상의 이미지를 그린다든지, 조형적인 구성의 한 부분을 창출해 낸다든지, 아니면 주관의 한 감성을 표출해 내는 그러한 차원의 것에 결코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그가 만나고 접하며, 느끼는 모든 대상을 통해 그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겠고, 그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체로서의 시간과 그 존재적 의미를 가시적인 물질의 변환을 통해 찾아보겠다는 그러한 차원에 있을 따름이다.그래서 그의 작업은 언제나 보다 본질적인, 그리고 더욱 실재적인, 과제의 연속 속에서 스스로의 에너지를 불태우는 하나의 추상이며 동시에 현실로서 존재하는 불가사의 그 자체로 남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깊이

시간의 깊이

삶, 색체, 회화, 형태, 체계…흰색, 침묵, 공허…가득찬 것, 절대, 균형, 욕망…기쁨…오래 전부터 이런 단어들이 머리 속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섬들처럼, 혹은 난파물들처럼 떠돌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그렇게 명확한 단어들의 모습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의 막연한 어떤 덩어리들이었기 쉽다. 이미 단어의 모습으로 (비록 그것이 서로 논리적인 관계를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환원되고 나면 「사람이 살지 않는 섬처럼」 되기는 어렵다. 그때는 이미 그 단어들의 섬 속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경험들이, 논리적 흔적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머리 속에 떠돌던 그 무엇은 내용이 비어있는, 단순히 말하고 싶은 욕구, 언어 이전의 내면적 에너지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에너지의 파편들이 문득 질서를 갖추면서 돌연히 어떤 언어적 단위가 되는 순간이 있다. 질서에의 욕구-그것 역시 말하고 싶은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욕구만 있을 뿐 그 욕구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영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또 다른 단어들이 그 속으로 밀려든다. 그 단어들이 중첩된다. 코드, 반복, 中性化, 계속성…

나는 최초의 흰 공간을 나의 색채들로 더럽힌다. 말을 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으면 싶다. 이 모순된 욕망 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흰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부정해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그림을 쓰고 잇는 것이다. 쓴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나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나를 떠밀어내기도 한다. 나는 그 두 가지 행위-그것은 과연 서로 다른 두 가지 행위일까? – 사이에서 그 어리둥절한 空地에서, 방황한다.

어느 날 나는 내 눈에 익숙치 못한 외국어로 쓰여진 책을 펴 들고서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백색표면에 도열하여 지나가는 활자들이었지만 실제로 내가 본 것은 그 위로 떠가는 색채들의 소리였다. 내가 경험한 그 짧고 난데없는 순간의 환희는 오래 지속되었다.

말을 잃은 상태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표현하거나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이라는 장치를 통하지 않고도 의미라는 단위들은 과연 생산될 수 있을까? 의문이 풀리지 않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하여 흰 공간을 색채들로 더럽힌다. 그 동안에도 나는 나의 색채들로 이야기를 꾸미고 화면을 써 내려간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 책을 바라보며 색채의 소리를 듣는 경험이 이번에는 그 색채의 소리를 쓰는 과정으로 전도되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나의 색채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나면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는 행위가 거기에 참가한다. 그렇다고 거기에 참가하는 그리는 행위가 완전히 무의식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경계가 매우 불투명하다.

하여간 이제부터는 더 이상 <언어>라는 문제라기보다는 「시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새로운 영역이 내 관심의 대상이 된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차원과 더불어 의미를 산출하던 언어들이 차츰 뒷켠으로 물러난다. 그때 그리는 행위가 참가하면서 만들어낸 표현들을 그 역시 또 다른 언어라고 말해도 좋을까? 그것을 언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탕이 되는 시간 또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한번도 조형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깊이」에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없다. 내 그림 속에서 선, 형태, 색채가 바라보는 사람의 머리 속에서 자아낼지도 모르는 「깊이」의 인상은 사실상 내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깊이라기 보다는 「그림을 쓰는」 행위의 중복에 의하여 서로 다른 시간들이 동일한 표면 위에 포개어질 때 생기는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의 중복은 조형적인 깊이 보다는 「시간의 깊이」에 가깝다.

천 위에, 투명 비닐 위에, 종이 위에 시간을 묻혀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시간을 포개어 묻히는 동안 재료 자체가 지니고 있는 속성들이 비로소 나에게 그린다는 행위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렇게 차곡차곡 겹쳐놓은 시간의 깊이들이 각각의 작품들이나 각 재료들 속에서 새로운 <언어>로 읽혀지기를 바라는 나는 벌써 또 다른 시간 속에 들어 앉아있다.

<양주혜>

*여기에 전시하는 작품들은 판화의 테크닉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판화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 판화처럼 동일한 영상을 반복, 재생할 수 잇는 성질의 작업은 아니다.

DRINKING A BOWL OF SOUP

DRINKING A BOWL OF SOUP

What MAY A CITIZEN EDUCATED IN THE West expect from contemporary art?

Particularly when, unlike most others, he is not involved in neo-platonic metaphysics, and most certainly not in the belief to art.

He thinks he has seen enough, and so misses the thrills in the arts that display the latest David Lynchlike approaches to his society. This is because his preferred ontology comes from the tradition of the ontology of nothingness, as expressed in the ancient Western philosophies of the old Hellenistic schools, Epicureans, Skeptics and Stoics. However, a pleasing point emerge, being the affinities between the interest in the state of desire found in ancient Greek thinking and the state of being, playful detachment and freedom from disturbance expressed in Zen Buddhism.

The above only goes to show that there is of course no such thing as Eastern or Western culture. It also explains why I react with recognition when confronted with the works of the Seoul-born artist Juhae Yang.

And this is not only because they remind us of the way the basic elements of the visual arts are presented as metaphors for the force of artistic intention by Buren or Toroni, for example. Juhae Yang’s paintings are composed of spots of various colours which appear to be part of an artistic design, but are actually rigidly organized in accordance with a predetermined code based on human activities such as popular or even children’s games. This means they are not an illustration or an evocation of any profound existential human idea, or a relationship with the unknown and mysterious. An unforced appeal, beauty without the desire to please, extreme complexity (they are both logical and chaotic in their creation and appearance) all this ensures the possibility of choice in the way of approaching them, according to time or mood.

Piet Vanrobaeys

Opus Operandi, Ghent, Belgium, 1996